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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이야기

<인간의 기쁨>과 <다큐멘터리>



<인간의 기쁨>이라는 책을 받았다. 같은 사무국에서 일하는 피디님의 지인이 낸 책이었는데 나는 처음 보는 책이다. <인간의 기쁨>이라는 말 뒤에 7이라는 숫자가 붙은 것을 보니 일곱 번째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예감은 맞았다. 1부터 7이 나올 때까지 나는 이 시리즈의 존재조차 몰랐던 것이다.

광고와 홍보가 중요시되는 현대사회에서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책들이 살아나고, 또 사라진다. 내가 왜 이 책의 존재를 몰랐을까, 물어볼 필요도 없이 이유는 수도 없이 많다. 내 생각에는 이 책의 존재를 알 만큼 적극적으로 출판계에 관심이 많지 않았다.”라는 말이 가장 적나라하고 독서를 좋아한다고 자신의 입으로 말해왔던 나에게는 부끄러운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글의 서두에서 흥미로운 부분을 발견했다. 아마 내가 이 책에 대해 알지 못했던 하나의 이유가 아닐까? 아래 부분은 내가 읽은 책의 서문의 일부이다. 그저 글쓴이와 호흡을 함께하며 읽어주길 바란다. 많은 양을 그대로 옮겨 쓰는 이유는 이 글 전체에 서려있는 분위기를 온전히 전해주기 위함이다.

신문사를 떠난 후 들어간 두 번째 직장에서 내가 업무상 쓰는 글의 종류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다. 행정 기안, 이메일, 사업 소개문, 발간사 또는 축사. ‘이라기보다는 문자라고 해야 할까 마감의 압박에서 해방된 삶은 제법 만족스러웠다. 그럼에도 새로운 업무에서 내게 허락된 글을 쓰는 일에 나름대로 공을 들였다. 기안을 올릴 때면 종전의 기안들에서 흔히 나타나는 만연체나 과도한 경어체를 탈피하고자 고심하며 문장을 다듬었다. 하지만 내가 올린 기안을 결재하는 팀장은 달라진 문장을 거의 눈치 채지 못했다. 외려 내가 분리한 문장을 다시 하나로 합치라고 빨간 펜으로 코멘트를 달았다. 내가 정성들인 기안은 예전처럼 복문과 비문 투성이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내가 낳은 문장의 수명은 종이 쪼가리에서 끝나버렸다. 글이라는 것 자체가 내 삶에서 빠져나가려는 순간 <인간의 기쁨>을 만났다. 오직 나를 위해서만 써도 되는 글이다. 그동안 내가 써 온 글은 거의 빠짐없이 독자를 염두에 두고 써야했다. 글은 본질적으로 실제이든 가상이든 간에 읽는 이와의 소통을 전제로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인간의 기쁨>에 글을 쓸 때면 조금 다른 경험을 한다. ‘아직은 잡문에 불과한 내 글이 과연 누구의 마음에 가 닿을 수 있을까.’ 매번 한없이 두려운 마음을 안고 글을 마감한다. 그러면서도 어느 순간에는 정말 나를 위한 글을 쓰게 된다. 너무 이기적인 목적의 글쓰기는 아니냐고 비난할 수도 있다. 그러니 네 글의 독자가 많이 없는 것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어느 때보다도 솔직해야 한다고. 그렇지 않고서는 단 한 문장도 이어나갈 수 없다고. 그래서 <인간의 기쁨>에 쓰는 글은 내가 이제껏 써 온 어떤 글보다도 글에 관한, 그리고 삶에 관한 지금의 내 상태를 가장 정직하고 투명하게 드러낸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 서문에서 글쓴이의 인기에 관한 고뇌와 그 고뇌를 이길 수 있는 자신의 진실한 글에 대한 갈망이 느껴졌다. 또한 내가 왜 이 글을 여지껏 몰랐는지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이런 책은 마케팅이라는 이름을 한 자본의 힘에 이끌려 여기저기 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런 책을 향유할 수 있는 이들은 어떤 표지판도 없이 우두커니 나그네를 기다리는 우물을 발견한 목마른 나그네와 같은 행운을 맞이한 것이다.

 

긴 서론을 끝내고 이제 다큐멘터리 이야기로 들어온다. EBS 국제다큐영화제는 12회를 맞이한다. 12, 12년이라는 뜻인데 나는 지금껏 이 사무국에 발을 디디기 전까지는 몇 편 보지 못했다. 그마저도 그 몇 편이라는 것은 EBS공영방송 채널을 통해 보았을 뿐이다. 티브이 전파라는 푯말 없이는 다큐멘터리라는 우물곁으로 갈 수 없는 현실 속에 내가 말하고 싶은 바는 분명하다.

 

다큐멘터리는 어찌 보면 영화판 <인간의 기쁨>이 아닐까? 다큐영화 감독들은 곧 <인간의 기쁨> 서문을 쓴 글쓴이와 같다. 나는 그레고리 맨큐 교수가 간단한 도식으로 우리에게 알려준 수요 공급 곡선을 보며 느끼는 자본의 논리대로라면 감독들은 저자본(아닐 수도 있다)에 만성적으로 시달리는 편일 거라고 상상한다. 아마 다큐영화의 감독들은 이기적이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다. “그러니 네 영화의 관객이 없지.” 라는 말을 들었을 수도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많은 관객들을 염두하고 그들의 즐거움을 위함이 아닌, 작가와 같은 마음으로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영상으로 통해 전하는 다큐영화 감독들이 짊어진 하나의 짐이다. 사실에 기반해 각색한 영화 <연평해전>은 애국심고취와 연평해전의 순국자들이라는 좋은 취지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클라우드 펀딩이 아니고서는 제작을 이어갈 수 없었다고 한다. 상황이 그럴진대 사실을 드러내고 방방 곡곡의 이야기를 그저 전하기원하는 다큐 감독들은 오죽할까.

 

하지만 위 이야기는 동시에 왜 다큐영화를 찍는가?”에 대한 질문의 답이기도 하다. 삶의 관한 자신의 생각을 정직하고 투명하게 전한다. 그렇기에 제 12회 국제다큐영화제를 홍보해야 하는 사무국 인턴의 입장을 가진 나는 종종 난처하다. 하지만 그 외의 시간에는-자주 그렇다는 뜻이다-기쁘다. 내가 사무국에 들어오면서 우물을 마주한나그네가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우물을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는 기회를 얻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렇기에 다큐영화는 기록영화임과 동시에 예술영화이다. 나는 다큐영화를 기록예술영화라고 부르고 싶다.

 

D-Box 서비스가 오픈한다. 그리고 조금 더 지나면 영화제가 개막을 한다. 여기에는 수많은 기록예술영화들이 쏟아져 나온다. 누군가는 이 사실을 모를 것이고, 우물을 발견하지 못한 목마른 나그네처럼 지나갈 것이다. 또한 누군가는 우물을 발견했지만 목마르지 않다고 생각하여 지나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을 봐 놓고도 D-BoxEIDF에 관심이 적은 이들은 후자에 속할 텐데 나는 그런 여러분에게 묻고싶다.

 

정말 목마르지 않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