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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DF 2016/EIDF 2016 상영작

[EIDF2016 스케치] <고려아리랑: 천산의 디바> Talk with Guest


 2016년 8월 26일(금), 오후 7시 30분에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고려아리랑: 천산의 디바Sound of Nomad: Koryo Arirang>의 TG(Talk with Guest) 행사가 진행되었다. 학자, 평론가,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역사와 현재를 다루는 다큐멘터리 ‘망명 3부작’을 제작 중인 김정KIM Jeong 감독이 관객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이 영화는 비극적 가족사를 가진 고려극장 여성 예술가들의 삶의 노래를 담은 음악 다큐멘터리로, 김정 감독이 제작 중인 ‘망명 3부작’의 두 번째 작품이기도 하다.


 TG 시간 내내 토론 분위기가 달아올라 많은 대화가 오가서, 질문을 영화 촬영 과정 자체와 관련된 이야기,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세계 시민-으로서의 고려인의 모습, 그리고 현대 다큐멘터리의 양식이라는 세 가지 주제로 나누어서 정리해 담았다.

 



- 영화 촬영 과정에서의 뒷이야기, 계기

Q. 이 영화를 이해하는데 가장 필요한 문맥은 이게 3부작으로 기획된 영화라는 점인 것 같다. 3부작으로 짜여지는 영화들은 많지만 사실 만들다 보니 우연히 3부작이 되거나, 다른 사람에 의해 3부작으로 명명되는 경우들도 많다. 이번 영화는 감독님의 ‘망명 3부작’의 두 번째 편에 해당하는 작품인데, 아마 세 작품이 촬영도 거의 동시에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3부작으로 전체 작품을 기획하게 된 의도나 배경이 궁금하다. 그리고 가능하시다면 세 작품 각각의 관계에 대해서도 안내해주셨으면 좋겠다.

A. 처음에는 안산이라는 도시에 관심을 가지고 학생들과 조사를 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캄보디아에서 이주해 온 여성 농민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고, 이런 다문화 여성들이 미디어를 활용하는 방법을 활용하려고 했는데 그 일부가 3부작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일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이전에 만들었던 <도시를 떠돌다>라는 작품이었다.

 그러다가 고려인들을 돕는 NGO '너머'를 알게 되었고, 이들을 통해 우즈벡 스타일 음식점을 하는 고려인 이주노동자 김알렉세이의 이야기를 촬영하게 되었다. 고려인에 대한 관심을 가지던 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사실 아버지가 원래 고려인에 대한 연구를 하시던 분이었다. 아버지는 굉장히 리버럴한 사상을 가지던 분이셨는데, 그럼에도 최초의 고려인 여성 사회주의자였던 김알렉산드라를 예찬하고 연구 욕심을 내셨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안산에 대한 관심이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고려인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옮아갔고, 특히 어떤 고려인 할머니가 하얀 수의를 자기 방에 걸어놓고 죽음을 기다리는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본 것이 내가 중앙아시아로 떠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대부분의 고려인들이 수의를 걸어놓고 있는데, 나는 당시 아버지 여읜 상태였기 때문에 ‘애도’ 자체에 굉장한 관심이 있었다. 사실 이런 다큐멘터리는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촬영이 어려운데, 중앙아시아로 떠난 이후 굉장히 놀라운 일들이 연속적으로 발생했다. 설날을 중앙아시아에서 맞아야 했고, 천산(‘톈산 산맥’)에서 아버지 제사를 지내는데 새가 한 마리 날아와서 제사를 지낼 동안 앞뒤로 돌아다니고, 제사가 끝나니 도로 사라지더라. 그 밖에도 고려인들이 우리를 굉장히 많이 도와주기도 했고, 이게 아마 이 영화를 만들라는 아버지의 유혹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 이후에도 굉장히 놀라운 일들이 많이 있었는데, 내가 가서 발견한 가장 중요한 점은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예술인들, 특히 예술 영화 감독들과 그들의 작품들이었다. 영화에도 자주 인용되었지만 송 라브렌티 감독의 <고려사람 >처럼 이들의 작업을 통해서 이들이 한반도에서 출발한 사람들 중에서 가장 멀리 나간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물론 미국에 사는 교포가 거리적으로는 더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일 수 있지만, 문화적으로 멀리 떨어져서 일종의 코스모폴리탄으로서 생활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꼴호즈Kolhoz에서 고려인들이 인민영웅으로 추앙받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고려말을 가르치고, 그 사회에서만큼은 고려말을 표준어로 사용하는 부분에 매혹되었다. 한민족의 이야기를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멀리 떠나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문화번역자로서의 고려인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고려인도 굉장히 호방하고, 중앙아시아의 풍경들의 복잡성도 있고, 이해 불가능한 다문화성도 있었다. 카자흐스탄의 유목 문화와 소련 연방 체제 자체의 혼혈성, 다시 그 위에서 고려인들의 빚어내는 혼종적인 문화의 이야기들을 다 담으려면 영화를 3부작까지 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Q. 오직 고려 사람을 찾아서 작정하고 간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끌려들어가듯 진행된 작업을 하셨던 것 같다. 또 하나 질문을 하자면, 3부작 앞에 여러 이름을 붙일 수 있었을 것 같다. 예를 들어서 이주, 유랑, 고려인 등의 단어도 사용 가능했을 듯 싶은데, 그 중에 망명이라는 단어를 붙인 것은 이 문제를 다루는 감독님의 시각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A. <익사일Exiled>라는 홍콩 영화를 굉장히 좋아하는데, 홍콩 반환 이후에 나온 상황에 대한 일종의 장르영화이다. 내가 2000년대에 만든 <거류>는 여성사 3부작의 첫 번째 작품인데, 솔직히 이 3부작은 억지로 꿰맞춘 것이 맞다. 만들고 보니 3부작이라고 부르면 멋있겠다. 싶어서 그렇게 했다. 거류라는 단어는 'Exiled'와 바꾸어 쓸 수 있는 말인데, 보통 일본의 거류민을 이야기할 때 사용하거나 불교적인 용어로서 머문다, 죽음이라는 의미를 갖는 단어로 사용된다. 제가 그 다큐멘터리 제작을 시작할 때 거류라는 것이 일본의 거류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단어를 빌려와서 여성들의 삶의 양태를 말하려고 했는데, 왜냐하면 시집 가는 자체가 내부적인 'Exiled'이기 때문이었다. 그 작품에서는 우리 할머니의 이야기를 다루었는데 이런 거류라는 개념이 이번 3부작의 타이틀인 망명과 연결되어 있다.

 


Q. 서강대 사학과 임지현 교수 : 망명 3부작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을 한국 민족으로 끊임없이 소환하려는 독백에 대한 안티테제로 작업 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감독의 생각도 그러했는지 궁금하다.

A. 방금 질문 주셨던 임지현 선생님은 우리에게 이들 문제를 다루는 독해 방식을 선도적으로 말씀해주신 분이다. 말씀하신 부분이 다 맞고, 좋은 질문 덕분에 앞으로 제가 말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려인을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재현할지, 한국이 마주하고 있는 세계화에서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배치하고 있는지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고려인에 대해서는 1937년 강제이주에 대한 이야기만 말해지는데, 그런 것들로부터 망명해서, 예를 들어 고려 아리랑은 김병학 선생이 작사하고 한야곱 선생이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김병학 선생은 민족주의자였다. 반면 이 노래가 재현되고 공연되는 방식은 카자흐스탄의 민속 악기를 다루는 세계적인 민속 악단을 통해서인데, 두 분의 지향점이 상충되는 부분이 있어서 흥미로웠다.

 그리고 저희가 카자흐스탄에 갔을 때 감동받은 것은 카자흐스탄의 예술•음악 학교의 소녀들이 한국말을 배우면서 고려 아리랑을 공연하는 장면이었는데, 흩어져 버렸지만 그 안의 핵들이 재생산되는 상자로 고려 아리랑을 생각했다.

 

Q. 영화의 구조를 물어보고 싶다. 시작할 때 방타마라(Bang Tamara) 씨의 인터뷰가 2-3분 정도 나오다가, 갑자기 리함덕씨 이야기가 영화 45분 정도까지 나오고, 다시 그 이후로 방타마라의 이야기로만 진행된다. 리함덕씨 이야기를 하는 부분에서는 우크라이나 출신이셨던 따님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방타마라씨의 인터뷰는 본인과 가족들의 말로만 이루어져 있는데, 이렇게 영화를 구성한 이유가 궁금하다.

A. 고려인의 삶이나 역사를 더듬어내는게 저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연구할 지도도 별로 없고, 제가 채록하여 영화에 담은 모든 것들이 다 그에 대한 파편이다. 폄하적인 의미에서의 파편들이 아니라, 우리가 프리즘처럼 편광시켜야 할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 방식으로 편집했다. 제가 앞서 말씀드렸던 이 다큐를 찍으며 얻은 행운 중의 하나가 많은 영상 발견했다는 것인데, 편집하는 과정에서도 계속 발견되었다. 이런 파편들을 조합하기 위해 그런 영화의 구성을 취했다.



- 코스모폴리탄-세계시민-으로서의 고려인

Q. 고려극장에 대한 영상이 나올 때 문패에 ‘카자흐스탄 국립 고려극장’이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카자흐스탄에서 이곳이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인민배우’라는 별칭을 가진 리함덕이 당시 사회에서 어떤 파급력이 있었던 것인지 궁금하다.

A. 영화 촬영을 위해 3년정도 연구를 했는데, 고려극장의 장면들을 많이 찍었는데 하나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고려극장의 전성기는 카자흐스탄 시기였는데, 물론 영화에서 말해지듯 고려공화국도 없는데 외국의 다문화 공간에서 고려극장을 지키고 있는 것은 현대의 시각에서도 존경할 만 하다. 그런데 그 전성기의 고려극장은 강제이주를 당한 사람들이 모여 벌판에서 공연을 즐기는, 그리고 그 복잡한 문화적 공간에 섞여서 고려말 노래 뿐만이 아니라 중앙아시아의 가요나 러시아의 민요를 부르기도 하며 코스모폴리탄의 삶의 형태로 등장하는 자발적인 맥락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마치 민족 문화라는 고정된 형태로 한류를 알리는 듯한 형태가 되어버려서 망명자-코스모폴리탄으로서의 고려인들의 모습을 담았던 원래의 공간과는 거리가 멀어져 버렸다.

 리함덕 선생에 대해서 가까운 지인들에게 생전에 어떤 모습이었는지 여쭤봤는데, 선생은 인민배우로서 고려극장을 이끄는 리더, 공인의 모습으로 지냈으며 사적인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단지 연극을 하는 엔터테이너가 아니라, 공인의 모습이었던 것으로 상상하시면 될 것 같다.

 


Q. 폐허가 된 옛 고려극장 영상이 나올 때 코스모폴리탄 레퍼토리 음악들이 나온다. 고려 민요나 이런 것들이 나올 것 같았는데 의외였다.

A. 제일 피하고 싶었던 것이 바로 그런 지금까지 고려인들에 대한 재현 방식이다. 계속 민요를 부르고, 항상 한민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식으로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코스모폴리탄으로서의 고려인에 초점을 맞추고 싶었다.

 

Q. 고려인이라고 하면 고향에서 쫓겨난 안타까운 한민족 이런 이미지가 많아서, 대상화되는 한민족 집단이 아니라, 건강히 거기서 잘 사는 개개인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또, 예술이 인민에게 어떤 식으로 관련을 맺는지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방타마라선생이 교회를 다니는 것인데, 정확히는 모르지만 소련은 개신교 문화권이 아니라 러시아 정교회 등의 종교 문화로 꾸려져 있다고 생각한다.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 정교회가 아니라 개신교를 믿으며 살아간다는 것이 소련 사회가 미국식 자본주의 문화와 개신교 문화와 접촉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 지역의 종교적인 상황이나 개신교와 방타마라 씨가 접촉하게 된 계기 등이 궁금하다.

A. 개인적으로 경험한 선에서 말씀드리면, 망명 3부작 작업에서 가장 많은 도움을 주신 분들은 오지 선교사들이었다. 함께 작업을 하면서도 중앙아시아에서 당신들이 사람들을 이런 식으로 개종하는 데 반대하고, 통역만 해 달라고 부탁하기는 했지만, 사실 그 사람들 덕분에 제가 여기 저기 오가며 촬영할 수 있었다.

 고려인들도 많은 부분 교회 커뮤니티에 닿아 있다. 카자흐스탄은 개방적인 다종교 국가라 당연히 개신교도 있다. 우즈베키스탄 같은 경우에는 강압적인 무슬림 국가이기에 개신교도들을 사형시킬 정도로 전혀 분위기가 다르기도 하다. 그럼에도 고려인이나 우즈벡 사람들은 소련 붕괴 이후 유일하게 합리적인 장으로서의 교회(지하 교회)를 선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제가 카자흐스탄에서 느낀 것은 이들이 기존의 기독교와는 달리 다문화 기독교 방식으로 선교를 하고 있는 걸 느꼈다. 사실 방타마라 선생의 경우에는 본인이 소련 붕괴 이후 자발적으로 교회를 찾은 것이라 이것과 결이 다르기는 하지만, 교회를 일종의 원시 공동체로 여기고 사람들이 모였던 것 같다. 이들의 교회는 탐구해 볼만한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Q.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의 작업 진행 상황은 어떻고 언제 볼 수 있는지 궁금하다.

A. 3번째 <굿바이 마이러브 NK(North Korea)>는 작업을 한창 진행중이다. 촬영도 아직 남아 있고, 내년 DMZ 영화제에서 상영 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자원활동가 기록팀 최지혁 사진자원활동가 기록팀 조이수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