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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OX/디뷰어의 시네마천국

소년이여, 너의 전쟁은 없다 (Fight Like Soldiers Die Like Children, 2012)

소년이여, 너의 전쟁은 없다
(Fight Like Soldiers Die Like Children, 2012)

패트릭 리드 Patrick Reed



디뷰어 : 박혜경


 사람들은 흔히 삶의 당위가 정의(Justice) 위에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살다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권선징악이라는것은, 또는 선인(善人)이 장수를 누렸다는것은 전래동화에 존재하는 것일 뿐 실제 이 세상에서는 ‘욕먹는 사람이 오래산다’는  불편한 진실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 어쩌면 ‘욕먹을 짓’을 해야 살아남는 이 세상인지 모른다. 욕을 먹을 만큼 타인을 제압하고 이용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게 이 세상일런지 모른다.


‘소년이여, 너의 전쟁은 없다(Fight Like Soldiers Die Like Children)는 1994년 르완다 학살 당시 UN평화 유지군의 지휘관으로 복무했던 로미오 덜레어 장군의 목소리를 담고있다. 역사상 가장 끔찍한 사건으로 회자되는 르완다 학살을 겪어낸 그가 자신의 남은 인생동안 목표로 삼은것은 다름아닌 소년병들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이 작품에는 소년병의 죽음을 막으려는 그의 노력과 목소리가 담겨있다.




르완다 학살이라는 생지옥을 목격한 그는 왜 전쟁과 관련한 수 많은 문제들 가운데 소년병 문제에 주목하게 되었을까. 다큐멘터리를 따라가다보면 그는 아마도 전쟁이라는 지옥불이 소녀들과 소년들을 연료삼아 타오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짐작된다. 덜레어 장군은 현재 장작불의 한가운데 나가 있는 소녀, 소년들이 다시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콩고지역으로 현장조사를 나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UN측에 도움을 청한 소년병들을 구출해 내기도 하고 현장의 목소리를 듣기도 한다. 이렇 듯 그가 소년병들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에 대한 현장조사의 장면으로 다큐멘터리의 씨줄이 자아진다.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말처럼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 국제 법률이나 인권이라는 말은 너무 멀리있다. 지금 당장 다음 숨을 쉴 수 있을지도 모르는 그 곳에서 참이나 거짓, 정의나 불의는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한다. 지금 당장 숨을 내 쉬도록 해줄 수 있는 힘만이 옳은 것이고, 지금 당장 따라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힘의 원리는 생각이 영글지 않은 소년들에게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자신이 가족을 지키지 못한것, 마을을 지키지 못한것, 나라가 혼란에 있게 된것은 모두 힘이 없어서이다. 그렇기에 자신에게 힘을 줄 수 있는 존재에 의지하게 된다.  그렇게 소년들이 병사가 되어가는 과정을 다큐멘터리는 애니메이션을 통해 생생히 그려놓는다. 망고나무 아래서 친구들과 놀던 소년이 어떻게 무시무시한 병사로 변해가게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다큐멘터리의 또 다른 날줄이 되어준다.






병사가 된 소년의 이야기는 작품의 후반부에서 왠지 모를 데자부를 이루어낸다. 소년의 목숨이 위협당할 때 느끼게되는 두려움과 흥분, 그리고 작품의 초반에  다시 현장을 찾은 덜레어 장군의 표정에 묻어있는 조용한 흥분이 대꾸를 이루는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애니메이션의 끝에서 소년병의 운명을 결정한 사람의 인상과 극 중에 나오던 파란 헬멧의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다시 살펴 가다보면 사실 이 다큐멘터리의 이면에 더 큰 이야기가 숨어있는것은 아닐까 생각이 깊어지기도 한다.







 작품을 보다가 갑자기 머리가 멍해지는 순간이 있었다. 이번 현장 답사에서 얻은 가장 큰 소득이 무어냐고 묻는 인터뷰어의 질문에 답사에 함께한 소령은 이렇게 답했다.  “첫째로 덜레어 장군님과 소중한 우정을 다졌다는게 중요하고요...”





현장답사의 목적이 소년병의 현재 실태를 파악하기 위한것 아니었던가? 그저 ‘관리’만 되고 있는 소년병들을 위한 정책이 근본적으로 어떻게 개선되는지 보려한것은 아니었나?

생각해보면 다큐멘터리 내내 소년병을 양산하는 무장단체들에 대한 비난은 있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왜 그런 무장단체가 생겨나는 지에 대한 논의는 언급되지 않았다. 외교적인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강대국의 누군가를 지목하기 보다는 손에 무기를 휘두르는 약소국의 실행자를 비난한다. 그에대한 하나의 예로 덜레어 장군에게 가장 큰 트라우마를 남긴 1994년의 르완다 학살의 경우를 들 수 있다. 르완다 학살은 잘 알려진대로 후투족과 투치족 간의 잔혹한 학살이 일어난 사건이다. 그러나 이 사건의 원인에 대해서 단순한 후투족과 투치족 간의 문화적 차이로 일어났다고 설명하기에는 한참 부족하다. 후투족과 투치족 간의 갈등은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통치와 관리를 쉽게하려는 전략에서부터 기원한다. 부족간 차별주의적인 정책을 심어놓은 서방의 전략이 지금까지도 반군의 반군을 낳으며 악순환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소년병을 양산해 낸 제국주의 시대의 과오에 대한 성찰이나 반성에 대한 언급은 없다. 악의 씨앗을 뿌려놓은 과거 제국주의 열강에 대한 외교적 압박도 없다. 그저 소년병을 이용하는 현재의 반군에서만 문제의 원인을 찾는다. 현지 사람들은 자신의 외부에 있는 무장단체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또 다른 무장 단체를 만들 수밖에 없는데 말이다. 현장답사의 목적을 인지하기보다 상관과의 관계가 돈독해진것을 만족해하는 소령의 얼굴과 강대국앞에는 약하고 약소국 앞에는 강하게 보이는 하얀얼굴들이 닮았다고 생각하는것은 나 뿐일런지. 악순환의 앞에서 순진하기만한 인간의 이상적인 선의는 되려 문제를 악화시킬 뿐이다.



작품을 다 보게 되면 덜레어 장군은 왜 꿈 속의 소년병에게 총을 쏘지 못하고 한밤중에 깨어나야 하는지 알게 된다. 어쩌면 소년병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 세계를 돌아다니는 덜레어 장군 역시 과거 어느시점에서 남들에게 ‘욕먹을 짓’을 저질렀기 때문에 지금까지 생존할 수 있었던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다. 만일 그가 과거에 저지른 ‘욕먹을 짓’때문에 다른사람들보다 오래 살 수 있다면, 앞으로는 소년병들을 조금이라도 더 살려줄 수 있도록 보다 근본적인 부분을 생각하며 애써주기를 바라본다.




'소년이여, 너의 전쟁은 없다' 감상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