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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OX/디뷰어의 시네마천국

마이크로토피아(Microtopia), 민달팽이족에게 주는 희망

마이크로토피아(Microtopia)


예스퍼 워시메이스터(Jesper WACHTMEISTER) | 전체관람가 | 52분 | 스웨덴 | 2013      


디뷰어 : 한유리





어렸을 땐 집을 떠올리면 푸른 정원에 빨간 삼각지붕에 테라스가 있는 2층집을 그렸다. 막연히 세상 어딘가 뚝 떨어진 곳에 그림같은 집을 짓고 살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어른이 된 후, 집은 형편에 맞추어서 사는 것임을 알았다. 산다는 것이 live의 의미도 되고 buy의 의미도 되고. 소유욕이 아무리 강해도 집만큼은 그게 잘 안된다. 주변에 수 많은 쇼핑 중독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스트레스 받아서 집 샀다"는 사람은 없다는걸 보니. 경제적인 이유가 첫째이긴 하겠지만 그 뿐만 아니더라도 집은 물건이 아니고 삶을 규정하는 양식이기에 쉽게 바꿀 수 없다. 주방에서 요리를 하면서 TV를 볼 수 있는지 여부에 따라 저녁 식사시간이 1시간 당겨질 수도, 늦춰질 수도 있다. 출퇴근에 3시간을 바쳐야 한다면 대부분의 시간을 녹초가 되어 살아야 하고, 도서관이나 영화관이 가까우면 문화생활을 훨씬 쉽게 할 수 있고 집 앞에 공원이 있으면 산책 30분이라도 더 하게 되겠지. 크고 예쁘고 새거라서 지르게 되는 물건과는 다르게 집을 산다는 것은 건물과 주변 환경, 교통, 직장과의 거리, 주변 소음, 마을의 구성원 등을 요목조목 재고 따져서 지불 가능한 제일 나은 선택하는 것을 말한다.


"집이 어디야?"라고 묻길래 어릴 때 마냥 나랑 가까운데 사나 궁금해서인가 하고 순진하게 대답을 했더니 "거기 집값은 얼마씩해? 원룸? 투룸? 월세? 전세? 보증금은 얼마야?"로 이어지고 나서야 그래, 내가 좀 사는 애인가 아닌가 궁금해서였구만 하고 깨닫고 한숨을 푹 쉬게 된 기억이 있다. 말하자면 집은 부의 척도다. 얼마나 비싼 동네에 어느 정도의 규모로 내 집인지 남의 집인지, 만약 내꺼라면 은행이 도와준건지 그럼 몇 년이나 은행에 돈을 갖다 바쳐야 하는지. 이런 정보가 파악이 되다보니 직장상사에겐 부하직원에게 하기 좋은 질문이기도 하다. 최소한 은행에 융자를 갚는 기간동안은 일을 해야하니 직장이 싫다고 때려칠 수가 없으니까 말이다. 부모님께 기생하던 삶에서 독립하여 집을 구하는 순간 갑자기 통장에 블랙홀이 딱 등장해서 모든 잔고와 월급을 집어삼키게 된다. 우리는 집을 사면서 기존의 경제 순환고리의 한 링크가 되어 열심히 노동하하는 톱니바퀴가 되는 셈이다.

집이 뭐길래. 좀 다르게 살 순 없을까? 왜 기존 방식대로 살아야 하지? 집으로 인해 톱니바퀴가 되는 체제를 거부하고 최소한의 거주공간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생겼다. 딱 컨테이너 한개 만큼의 공간. 컨테이너를 들고 사막으로 가자. 아니, 아예 공간을 없애고 달팽이처럼 집을 조그만 원형으로 만들어서 끌고다니자. 내가 자는동안 자동으로 이동하는 집을 만들면 어때? 그러지 말고 언젠가는 허물어서 건축폐기물이 되는 집 말고 남아도는 페트병으로 재생 가능한 집을 짓자. 아니아니, 그 것도 거추장스럽고 비닐로 집을 만들어서 바람을 넣으면 집이 되고 바람을 빼면 입을 수 있는 침낭형 옷을 만들어버리지 뭐. 이런 실없는 상상을 모두 현실에서 구현하는 건축가들이 최근에 많이 생겼다. 빌딩숲의 도시에서 건물과 건물 사이의 방치된 공간을 활용하기도 하고 나무에 텐트를 매달기도 한다. 물론 침낭쯤 되면 이 것도 집인가 이건 노숙 아닌가 싶지만, 여행자에게는 더할나위 없이 좋은 숙소일 수 있다. 이런 대안적인 공간에 살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삶을 단순화해서 진짜 좋아하고 필요로 하는 몇몇 물건과 공간만을 남기는 것이다.

이처럼 기존의 거주 형태를 거부하는 것은 일종의 의지표명이다. 기존 경제구조의 악순환을 끊겠다는 의지. 더 이상 지구에 쓰레기를 생산하지 않겠다는 의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 만들어놓은 불필요하게 넓은 공간에서 살지 않겠다는 의지. 옷으로 따지면 홈쇼핑도 백화점도 뚝 끊고 재봉틀을 사고 천을 떼서 입고싶은 옷을 만들어 입는 것과도 같다. 게다가 '옷이 두 벌이라 한 들 무엇하리 몸은 하나인 것을' 하면서 딱 한 벌만 만들어서 365일 입는다면.. 좀 비슷한 느낌일라나. 물론 부모님을 모셔야 하고 아이를 키워야 한다면 영화에 나온 것 같은 초소형 주택 거주는 힘들다. 하지만 1인가구 500만의 시대인데, 나홀로족에게는 초소형의 이동식 집이 지긋지긋한 집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건축가들의 공간과 삶에 대한 깊은 고민, 그들이 제시하는 기존 규칙을 깨는 아이디어는 현실판 드림하우스이다. 언젠가 내가 살아봤으면 싶지만 살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런 공간이 어딘가에 있고 누군가가 살고 있다는 것은 나같은 민달팽이족에게 '더이상 집때문에 허덕이며 톱니바퀴의 삶을 살지 마세요'라고 외치는 희망적인 메시지임은 분명하다.




TIP. 약 30분 30초쯤 건축가가 하는 말이 인상적이다. "오늘날의 집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집은 일종의 수납장이죠. 내 추억이 서려 있지 않다면 아무것도 아닐 것들로 가득하니까요. 집에 있는 건 모두 다른 곳에도 있어요. 식당에 가면 더 잘 먹을 수 있고 사우나에 가면 더 잘 씻을 수 있죠. 우리가 사는 도시에 그런 장소들이 다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항상 집을 원하고 있죠. 집만이 자신의 주거지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건 너무 감상적인 생각이에요. 틀에서 벗어나서 생각하면 그런 건 그냥 집착에 불과하거든요 . 집에 아니어도 어디에나 추억은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