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BOX/디뷰어의 시네마천국

참을 수 없는 죽음의 가벼움 <내가 정말 미소짓고 있었을까>



참을 수 없는 죽음의 가벼움

<To See If I am Smiling>


디뷰어: 김현정







타마르 야롬 Tamar Yarom | 15세이상관람가 | 59분 | 이스라엘 | 2007





카메라를 통해 보는 세상이 과연 진실일까




여기 카메라가 하나 있다. 당신은 이 카메라를 통해서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과연 그 세상은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영화를 보는 관객은 그것이 진실이 아님에도 잠시동안 진실이라 믿고, 사실을 기반으로 하는 다큐멘터리를 보며 사람들은 그것이 사실일 것이라 믿는다. 의심은 조금 들어도.

감시카메라를 통해 혹시라도 테러를 일으키지는 않을까, 사람들을 예의주시하는 이스라엘 군인의 시선은 그래서 오로지 카메라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런데 카메라 앵글에 들어온 것은 어린 아이들이다. 저런 아이들이 테러를 일으킨다고? 상황을 모르는 우리는 그저 혼란스럽다. 어째서 저런 아이들이 감시의 대상이 된다는 것일까. 비현실같은 현실 속에서 감시일을 하는 그녀도, 속으로는 혼란스러운 것 같다. 그녀는 말한다. 언제나 내 자신이 먼저 의구심이 들었노라고.






옳은 것은 무엇일까


남녀모두 의무적으로 군대를 가야 하는 이스라엘. 여성들은 18세가 되면 2년동안 군복무를 해야한다. 다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대립하는 가자지구와 웨스트뱅크 지역에서 팔레스타인인을 매일 만나야 하는 여성 군인들을 다룬다. 일반병이 아닌, 장교로서 훈련과 교육을 받은 그들이 배치받은 곳에서 겪는 일들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슬프고 잔혹한 역사만큼, 슬프고 잔혹하다. 그곳의 역사는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생물이라고 했던가. 그녀들은 그곳의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삶에 적응해간다. 방관자인 우리가 그녀들을 비판할 수 있을까? 과연 내가 그 상황에 있었더라면 그녀들과 다르게 행동할 수 있었을까? 옳은 것은 무엇이고 그른 것은 무엇인지, 목숨이 걸린 전장에서 그 판단은 의미가 없어지는 듯 하다. 그러나 그 판단을 해 볼 시도조차 사라지는 것이 옳다고, 어쩔 수 없었다고 가벼이 말하기에는 타인의 생명이 너무나도 무겁다.





그녀들은 그렇게 그곳의 생활에 의구심을 품고, 자신의 가치관을 잃고, 적응하고, 익숙해지고, 그곳에서 살아가기 위한 새로운 가치관을 만들어낸다. 지켜보는 이들은 그저 당혹스럽다.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지? 그러나 이런 외침과 물음은, 현장을 겪어보지 않은 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공허한 울림이다. 나를 포함하여. 






그녀들과, 그녀들이 속해있는 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인들과 서로 목숨을 걸고 대치한다. 이스라엘이 장악하고 있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이 계속되는 그곳에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죽이고, 팔레스타인도 이스라엘을 죽인다. 지역을 보호하겠다는 명분으로 온 그들은 폭력이 폭력을 낳고, 복수가 복수를 낳는 그곳의 양태에 점점 물들어간다. 나에게 소중한 이가 죽었기에, 그 범인이 아니라 범인이 속한 집단 전체로 분노를 돌린다. 그 때의 일을 회고하는 그녀는 그것이 결코 현명한 일은 아니었음을 느끼는 듯하지만, 당시의 그녀로서는 그 분노를 돌릴 곳이 필요했다. 그 분노는 슬프게도 또다른 분노로 이어져가지만 말이다. 




또다른 여성은 자신이 행했던 일에 놀라울 정도로 객관적인 자세를 취한다. 살인 혹은 폭력에 대한 죄책감을 드러내는 여성들 사이에서 이 여성은 죄책감이라는 말로 자신을 위로하고, 포장하지 않는다. 자신 안에 숨겨져있던 폭력성 역시 자신의 일부였음을, 그녀는 놀랍게도 인정한다. 자신의 이면, 그것도 폭력성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그녀의 이런 담담함은 뻔뻔하지 않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대치하는 그 상황을 현실적으로 표현해준다. 악으로만 가득할 것 같은 그 세계에서, 악은 무엇이고 선은 무엇이며, 옳은 것은 무엇일까.



그럼에도



조용히 다큐를 보다보면, 그녀들의 도덕성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된다. 무고한 사람들을 벌주고, 부정행위를 그냥 넘겨버리는 그녀들은 마치 악을 대표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행동들을 회고하는 그녀들의 모습에서, 이들이 얼마나 잔혹한 지를 보여주는 것이 다큐의 목적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비이성적인 세계에 익숙해지기 전, 의무장교였던 그녀는 치료 중 환자가 사망하는 상황을 겪게 된다. 사망한 환자를 보며 그 죽음의 무게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을 그녀에게 들려오는 말은 '축하해'였다. 그녀의 표정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그 감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녀는 그렇게 그 세계에 익숙해져갔다.




어째서 그런 일을 벌일 수 있으냐. 이성적으로 말이 되지 않지 않은가. 그러나 그것은 일이었다. 그녀들의 변명은 슬플 수밖에 없다. 일이었기 때문에 해야했다. 권위에 대한 복종 실험이 생각난다. 일이기에 하지 않으면 안되는 세상에서 그녀들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있었다 해도 없을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그녀들을 비난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들을 가장 비난하고 있을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이기 때문에.




죽음이 넘쳐흐르는 그곳에서, 죽음은 너무나도 가벼워진다. 각각의 죽음의 무게는 무거울지라도, 그것이 쌓이고 쌓이면 역설적으로 가벼워지게 된다. 죽음이 가벼워지는 세상, 현대 사회는 또다시 그런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곳이 굳이 전쟁터가 아니라 하더라도.



내가 정말 미소짓고 있었을까



그곳의 세계에 익숙해진 그녀는, 그곳의 세계에서 벗어난 지금의 시점에서는 차마 상상하기도 힘든 일을 하게 된다. 그 당시에 찍은 사진에 과연 자신이 정말 웃고 있었을지, 그녀는 두렵다. 그러한 상황에서 웃을 수 있는 자신이 혐오스럽고, 악마와 같이 느껴진다. 간절히 웃지 않았기를 바라건만, 그녀는 확신할 수 없다. 아니, 자신이 웃었던 것을 부정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오래된 사진을 꺼내들며, 그녀의 표정은 괴로움에 휩싸인다. 다큐는 사진을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느낄 수 있다.

그녀는 자문한다.









<내가 정말 미소짓고 있었을까> 감상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