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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OX/디뷰어의 시네마천국

나의 어머니 그레텔: 기억, 그 소중한 아픔

디뷰어: 신택수



우리가 외부자극을 완전히 차단시킬 수 없다면, 우리는 관계맺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지금 당장 모든 감각을 잃더라도, 자극이 기억으로 남아있는 한은 여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는 관계를 지속 시켜 나가며 그 관계와의 산물을 계속 쌓게된다. 우린 그걸 추억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보통 어머니와의 관계를 깊이 간직한다. 물론 그 관계의 산물이 항상 기쁨일 수만은 없다. 모든 희노애락을 담고있다. 중요한 것은 그 내용이 나만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관계는 양방향이기에 어머니도 나와 함께한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우리가 함께한 사건들은 중요하다. 그것은 나와 엄마의 삶의 일부이다. 


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치매는 이러한 소중함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것 같다. 어머니 그레텔의 기억 밭 속 오랜 고목들이 하나 둘 씩 죽어간다. 그 오랜 나무들은 그녀와의 관계맺음에 동참했던 수 많은 이들이 함께 심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기억 밭엔 식물이 오래 살 수 없는 환경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나의 기억 밭에 자신이 심은 나무가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다. 그녀는 가끔 자식과 남편을 하나의 타인으로 받아들이고 만다. 그저 앞에 있는 하나의 인간, 최초의 만남. 그 안엔 어떤 추억도 깃들어있지 않다. 그 모습은 그녀와 관계맺었던 이들을 가슴아프게 한다. 


'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 사람의 삶 속에 나에 대한 어떤 과거도 없는 것일까?'


하지만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추억이 남아있다. 그의 어머니가 자신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어머니와 자식이 함께했던 세월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여전히 자식에게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여전히 그녀 곁을 지키고 있다. 더 이상 생동감 넘치는 양방향-기억 만들기는 불가능해졌지만, 기억은 그렇게 관계 속에, 우리의 인생 속에 깊게 똬리를 틀고 있어서 한 쪽이 기억을 잃어버린다고 해도 쉽사리 끊어지질 않는 것이다. 마치 더 이상은 자라지 않을 박제된 관계를 품고 남은 생을 살아가는 것과 같다.

그레텔의 남편은 박제된 기억을 들고 남은 생을 살아야 한다.



나도 가끔 어떻게 해야할지 모를 때가 있다. 주로 슬프고 아쉬운 일들이 떠오른다.

누군가가 내 곁을 떠났고, 나도 누군가의 곁을 떠났다. 하지만 기억이 남아있는 한, 그 관계가 사라진 건 아니다. 난 떠났다고 생각했을 뿐 아직 그 주위를 맴돌고 있는 셈이다. 아직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박제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아직 기억하고 있는 많은 관계들, 수 많은 실수들, 내가 준 아픔, 내가 받은 아픔들을 잊고싶어 한다. 

아픔을 치유하려면 또 다른 종류의 아픔이 오니까, 마치 상처에 소독약을 바르는 것처럼.

그 고통이 무서우니까 차라리 상처의 존재를 잊고싶을 때가 있다. 어머니 그레텔의 삶 속에 그 상처의 존재들은 송두리 뽑혔고, 이제 더이상 그레텔에게서 과거 이야기는 무의미해졌다. 그래서 감독은 그녀가 남긴 발자취를 통해 자신 어머니의 삶을 추적했다.


어머니 그레텔의 과거는 더 나은 삶의 터전을 위한 분투 그리고 그 분투보다 몇 배는 더 뜨거웠던 사랑과 아픔들이었다.

우리가 이 기억들을 잃기 전에, 그래서 누군가 우리의 지난 날을 우리의 발자취를 통해 찾기 전에- 그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박제된 이후이므로- 바꾸고자하는 것, 바로잡고자하는 것, 좀 더 나은 상황으로 만들고자 하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될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