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지구의 품으로
<Planetary 행성, 지구>
디뷰어: 김현정
가이 리드 Guy Reid | 12세이상관람가 | 85분 | 영국 | 2015
Planet, 지구, 그리고 인간
회색빛 도시생활에 지칠 때, 사람들은 자연을 찾는다. 일상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각종 도구가 발달한 현대문명사회이지만, 자연에서 얻는 위안은 그런 기기들이 주는 위안과는 사뭇 다르다. 인공적으로 조성된 공원에서 느끼는 기분과 날것 그대로의 산 속에서 느끼는 기분은 또한 다르다. 산이 많은 한국에서야 도시에 지쳤을 때 찾아갈 곳이 조금이나마 있지만 인간이 만들어낸 도시가 끝없이 펼쳐진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순수한 자연은 꽤나 멀게 느껴질 것만 같다. 그런 우리에게 자연의 경이로움을 그저 넋 놓고 느끼게 해 줄 수 있는 다큐멘터리가 있다. <Planetary>이다.
그저 아름답고, 경이롭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지구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나 자신이 정말 작게 느껴진다. 압도적인 아름다움에 사로잡혀 있는 찰나, 같은 원 모양의 형체를 알 수 없는 영상이 바로 눈앞에 나타난다. 잠시 뒤 상황을 이해해본다. 사람이 만든 우주선이다.
‘네모의 꿈’이라는 노래를 한창 부르고 다니던 때가 있었다. 온통 네모난 것으로 이루어진 사람들의 사회. 아이러니하게도 지구 바깥, 우주에서 지구를 내려다보고 있는 우주선들은 자연의 선인 곡선으로 이루어진 것들이 많은 것 같이 느껴진다. 지구의 모습을 닮은.
지구에서 태어난 우리 인간은, 어느새 지구 밖으로도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지구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런데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의 모습을, 아이러니하게도 지구 자신은 볼 수가 없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평생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듯이, 우리가 보는 지구의 모습은 인간을 통해 지구가 자신을 바라본 이미지가 된다. 이러한 단순한 사실이 나를 놀라게 했다. 그리고 지구는 아이가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설 때까지 묵묵히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처럼, 침묵하며 우리의 모든 행동을 바라보고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문득 지구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하는 궁금증이 인다. 어린아이의 질문 같지만, 지구 앞에서 우리는 모두 어린아이가 아니던가?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Humans became PLANETARY 40,000 years ago"
사실 Planetary 라는 단어는 '행성의, 이 세상의, 지구상의'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넓게는 방랑하는, 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인간은 planetary가 되었고, 빠른 속도로 이 지구에 자신들의 새로운 세계를 세워나갔다. 자연 앞에 무력했던 인간은 어느새 자연과 어깨를 나란히 하더니, 이제는 자연을 앞서나가 이기려고 하고 있다. 다행히 현대에 들어서 이러한 문제점을 자각하게 된 일부 사람들은 자연과 인간이 단절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다큐멘터리는 단순히 ‘자연을 보호’하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지구와 인간은 필연적으로 단절될 수 없는 존재임을 깨우쳐주고 있다. 쉽게 생각해보아도 그렇다. 지구에서 태어난 인간이 어떻게 지구와 단절될 수 있겠는가. 결국 우리가 어디에서 나고 어디로 가는지는 자연을 보면 쉽게 깨달을 수 있는 문제들이다.
스스로를 자연을 사랑하고 소위 말하는 '친자연'적인 사람이라 불렀던 나도 그저 자연을 보호하고 사랑하자라고만 외쳤지, 나 자신이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으로 인해 수많은 자연이 훼손되어가고 있는 상황을, 지구에서 태어난 인간이라는 생물의 '자연적인' 행동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기에 자연은 보호해야 하는 것이지만, 그 본질이 바로 자연과 인간의 근본적인 관계에 있음을 알았으면 한다. 그리고 다큐도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는 이렇게 말한다. 동물들의 대량멸종에 관한 충격적인 연구 결과가 나온 다음 날, 서둘러 뉴욕타임스를 펼쳐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 달리, 그 기사는 신문의 25면에 작게 실려있었다.
그의 말을 듣고, 너무나 가슴이 쓰렸다. 지구 상의 대량 생물 멸종이야기가 지금 나온다 해도 그것은 여전히 25면에 실리지 않을까. 혹은 '이젠 그런 이야기 다 잘 알고 있으니, 그만 이야기해!'라며 묵살당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분명히, 계속 이야기되어야 한다.
인간을 위해 자연을 이용하고, 훼손하기까지 하면서 이루어낸 문명 속에서 인간은 오히려 불행하다. 행복해지기 위해 자연을 이용했건만, 우리는 여전히 불행하다. 자연과 인간의 삶이 본질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특히나 문명의 최정점을 찍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너무나도 외롭고, 단절되어 있다. 혹자는 '먹이사슬'에 따른 '냉혹한 자연의 세계'라고도 말하지만, 자연은 그렇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 분리하고 나누고 구분하기를 어느순간 좋아하게 된 우리 인간들이 멋대로 표현한 자연은 그리 냉혹하지 않다. 그 따스함을 받아들이지 못해 냉혹함이라 표현하는 것은 아닐까.
삶은 또한 너무나 바쁘지만, 그 바쁨이 충만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다들 시계는 있지만 시간은 없구나, 라는 한 노인의 말이 가슴을 또 울린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사회에서 우리는 시계만 갖고 시간을 갖지 못했다. 나 또한 이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음에 고개를 떨군다.
그리고 따스한 미소처럼 따스한 그 한 마디가 다시 나의 고개를 들게 한다.
집. 우리의 집인 자연과 어머니 지구의 품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뒤돌아보기
다시 한 번 지구를 바라본다. 눈앞에 펼쳐진 지구에는 선이 없다. 그 지구의 모습에 선을 그어야지 그것이 '세계'이고 '지구'라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하게 되는 스스로를 원망한다. 어릴 때 배웠던 지도 위의 선들이 없듯이, 자연에는 경계가 없다. 그 '경계 없음'이 자연의 본질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잠시 다큐멘터리 속 인간의 사회와 자연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을 맛보기로 감상해보자. 자연에 비해 인간사회는 탁하고 답답하고, 뿌옇게 표현되고 있지만, 영상미적인 측면에서는 이조차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 이 다큐멘터리의 특징이다. 자연과 단절된 인간사회를 비판하지만 그 영상들조차 감탄하며 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반대로 자연은, 그저 영상일 뿐인데도 그 어루만지는 감촉과 소리가 느껴지고, 때로는 인간의 작은 몸을 완전히 압도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누군가에겐 85분동안 길게 이어지는 잔잔한 영상이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나는 러닝타임 내내 펼쳐지는 그 황홀한 모습들에, 영상이 끝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영상이 끝나는 순간, 나의 삶은 다시 딱딱한 현실로 돌아오게 되므로. 하지만 영상이 끝난 후 우리가 다시 돌아가는 곳이 이전과 똑같지 않기를 바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다큐멘터리일 것이다. 자연과 인간은 단절되어 있지 않음을. 단절하려 해도 안되고 단절되어도 결국 다시 돌아가야 함을. 지구는 침묵하지만, 우리는 분명 느끼고 있다고 믿는다.
경외감은 현대사회에서 '아이같은 반응'이라며 무시당하지만, 그렇지 않다. 누군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그 경외감을 애써 숨기려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경외감은, 다큐멘터리가 말하듯이 '평화로 가는 출구'이다.
생태 철학자이자 운동가인 조애나 메이시는 확신과 경이에 찬 눈빛으로 말한다.
순간적으로 마음과 이성을 건드리는 것이 자연이라고.
그것은 우주의 키스와도 같고, 그것이 자연의 진정한 아름다움이라고.
그것을 아는 데 오래 걸리지도 않는다. 논쟁도 필요없다. 모든 설명이 사라진다. 무슨 일이 생길 지 생각할 겨를도 없다, 고.
그저 우리가 마지막 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지구를 섬길 거라는 것만 알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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