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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OX/디뷰어의 시네마천국

스페이스 투어리스트(Space Tourists, 2009)-천문학적인 삶

스페이스 투어리스트(Space Tourists, 2009)

크리스찬 프레이 Christian Frei



디뷰어 : 박혜경


어쩌면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이제까지 인류의 역사가 증명했듯이 우리 사회에서 진정한 평등, 정의, 자유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말이다. 이 우주에 인간이라는 존재가 등장하면서부터  수 많은 정치적 공작과 부정부패, 진실의 왜곡과 거짓말은 언제나 함께였다. 그리고 단언컨대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이렇게나 인간은 진실에 눈 먼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둘러싼 모든 것은 정직하고 성실하며 진실되게 자신의 일을 해 왔다.   45억년간 정해진 자리를 성실하게 돌고있는 지구, 그리고 그 지구에게 끝임없이 에너지를 공급해준 태양, 지구의 탄생 이전부터 지구를 향해 빛을 쏘고있는 셀 수 없이 많은 별들. 아마도 이 우주 전체를 통틀어 가장 부정직한 것은 이 조그만 지구라는 행성의 인간이라는 존재일지 모른다. 그렇기에 정직과 성실로 가득찬 이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불안정하고 부정직한 존재인 인간이 하늘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끊임없이 탐구해 온것은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크리스찬 프레이의 2009년 다큐멘터리 ‘스페이스 투어리스트(Space Tourists)는 우주를 동경해 온 인간의 오늘이 어디까지 도착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과거 전문가들이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떠나갈 때 사람들은 ‘우주 탐사’라는 말을 썼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의 이야기 일 뿐 이제는 다큐 속 말마따나 ‘우주비행은 더는 전문가들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다. 연구의 목적을 가지고 가는 ‘탐사’보다 개인의 만족감과 행복감을 추구하는 ‘여행’으로서의 성격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런 천문학적인 여행에는 물론 천문학적인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2천만달러의 금액을 지불하고 인류의 첫 민간 우주여행에 자원 한 사람은 이란계 미국인 사업가인 ‘아누세흐 안사리’이다. 2천만 달러, 그러니까 우리나라 돈으로는 약 2백억원에 해당되는 이 금액은 그녀가 우주에 8일간 머물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200여 시간도 안되는 우주여행으로 그만큼의 돈이 쓰이는것에 대해 누군가는 무가치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런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의 그런 비판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큰 돈을 쓴것 때문에 저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꿈에 가격을 매길수는 없죠. 팔다리를 잃거나 목숨을 버릴 가치가 있을까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편도티켓이거나 목숨을 잃는 한이 있어도 저는 우주로 갈 거예요. 어떤 대가도 지급할 각오가 돼 있어요.”


그리고 그녀는 우주에 무사히 도착한다. 그리고 우주에 머무는 시간동안 어린시절부터 꿈꾸어왔던 모든 것을 실험해 보고 시도해본다. 무중력 상태에서 머리를 감아보거나 우주식 식사를 해보거나, 배설물을 처리하는것, 무중력상태이기 때문에 가능한 놀이들. 우리눈에 의미있는것이 아닐지라도, 혹은 먹고 자고 누리는 공간이 그리 편리하지 않아도 그녀의 얼굴은 행복으로 가득하다.

 

  만약 여기까지가 다큐멘터리의 전부였다면 아마 이 다큐멘터리의 제목은 그냥 ‘A tourist’였을 것이다. 다큐멘터리는 마치 잘 짜여진 합창곡의 솔로와 합창 처럼 아누세흐 안사리의 이야기와 함께 카자흐스탄의 바이코누르기지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대비해서 비추고 있다. 저 높은 곳에서 안사리가 자신의 천문학적 여행을 들려줄 때 저 낮은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자신들의 생존과 연관된 천문학적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이 거대한 합창이 울려퍼지는 카자흐스탄의 황량한 초원에 매그넘 사진작가인 요나스 벤딕센이 카메라를 들고 동행한다. 나 역시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알게되었지만 요나스 벤딕센(Jonas Bendiksen)을 검색해보면 연관검색어로 satellites가 같이 표기되는것을 발견할 수 있다. 첨단과학의 총아인 우주선이 카자흐스탄 농촌마을 한가운데 떨어져 있는 그의 사진들을 보면 뭔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느낌이 든다. 이번에 그가 카자흐스탄의 바이코누르기지 주변사람들을 따라가게 된 것도 우주선의 잔해를 수거해서 먹고사는 그들의 삶을 담기 위함이다.


다큐멘터리를 보는 사람들은 거의 신경쓰지 않았겠지만, 나는 요나스 벤딕센이라는 사진작가가 과연 어떤 사람일런지 궁금해진 장면이 있었다. 다큐멘터리 초반에 비행기를 탑승해서 책을 읽는 그의 모습인데, 이때 그가 읽는 책이 미국의 작가 ‘존 크라카우어’가 쓴 ‘Into the wild’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품이라서 책 표지가 나왔을때, 왠지 모를 반가움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into the wild’라는 이야기가 보여주는 자본이나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과 가치관들이 그가 상업적 우주여행을 보는 관점과 같은 결을 갖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런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게 그는 러시아가 주도하는 상업적인 우주여행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한다.


“러시아의 우주계획은 상업화의 노예가 되고 있어요. 누구든 돈만 내면 기술과 지식을 넘겨받을 수 있죠. 호기심이  있어야 할 자리에 비웃음과 저속함이 자리하고 값싼 돈의 냄새가 풍겨요.”


그의 이야기 때문인지, 아니면 촬영 여건이 우주보다는 지구가 더 좋아서 였는지 이 다큐멘터리에서 아름다움이나 숭고함은 우주로 나가있는 안사리의 모습보다도 황량한 카자흐스탄의 초원 한가운데서 모닥불을 떼며 밤을 새는 주민들의 모습을 통해 더 드러난다. 우주선의 잔해가 떨어질 만한 곳으로 낮밤을 달려가는 주민들, 그리고 그 거대한 잔해를 마치 거대한 동물을 해체하듯이 조각내어 자신들의 트럭에 실는 거대하고 천문학적인 여행. 이제 다시 낮밤을 달려 이 천문학적인 고철들을 파는 곳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고철들은 돌고 돌아 우리집 주방 알루미늄 호일로 재회하게 될 것이다. 하나 재미있었던 것은 그 모든 작업의 시작이 우주선 부품 중 냄비로 쓸 수 있을만한 것을 찾아내는 데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우주에 나가 있든, 그 가치를 짐작할수도 없이 황량한 초원에서 밤을 새든 어쨌든 인간이라는 생명을 유지하기위해 일단은 먹어야 하는 것이다.




사실 초원 한가운데에서 요리하는 이 장면과 함께 대비되는 장면이 우주에서 우주식을 먹는 장면이다. 음식의 종류도 다르고 음식을 먹는 장소도 다르고 그 음식에 들어간 돈도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다. 황량한 초원 한가운데에서 우주선 부품으로 끓인 가난한 음식이 더욱 맛있을 것이라는 것 말이다.


그렇다, 먹는것. 아누세흐 안사리가 지구에 다시 돌아왔을 때 사람들이 그녀를 환영하며 가장먼저 건넨것은 사과와 꽃다발이었다. 에덴동산에서 이브가 선악과를 베어물었기 때문에 현재 인간들이 사는곳으로 쫓겨왔다는 옛이야기 처럼, 안사리가 베어먹은 사과 하나는 어쩌면 지구를 떠나 우주로 영역을 넓혀가는 인류의 시작점이 될런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우주여행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버려져야 하는 크고 무거운 추진체들이 있기 마련일 것이다. 사진가 요나스 벤딕센이 목격한것 처럼 발암물질 높은 우주선의 잔해들이 무방비한 농촌 어느 마을에 떨어지는 일들, 그로 인해 가장 생태다양성이 높은 알타이 지역의 생태계가 악화되는것, 아주 단순하게는 혹시나 자신의 지붕위로 우주선이 떨어지지 않을런지 불안해 하는것들 말이다. 그것이 어마어마한 사치를 보여주든 밥벌이에 의한 필요를 보여주든 이 다큐멘터리가 보여주는 우주를 둘러싼 두 삶의 모습은 모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그 두 삶 모두 어느정도의 부정직함과 왜곡을 포함한다 해도 그들의 눈이 우주에 고정되어 있는 한 우주가 보여주는 거대한 정직성의 교훈을 언젠가 깨닫게 되리라 순진하게 믿고싶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인류가 우주를 끊임없이 바라보는 동안 아직까지는 부정직과 왜곡에서 자유롭지 않기는 해도 인류의 역사는 진실과 정직이라는 우주의 법칙에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고 있는것으로 보인다. 어느 한 민종의 생물적 우월성을 나타내려는 주장이 반박된것은 오래전이며 세계 곳곳에서 생래적 조건에 의한 차별이 얼마나 어리석은것인지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고 있다. 귀족이나 천민 같은 사회계급을 나눈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인류는 배워왔고 짧은 호흡 속에 진실이 왜곡될 수는 있어도 거대한 시간 앞에 언젠가 진실이 드러나리라는 것을 인류는 깨달아왔다. 비록 부정과 부패 속에서 헤어날 수 없는 인간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의 거대한 정직성에 하나씩 궤도를 맞추어 나가고 있다고 믿는다. 우주가 '신비'로만 해석되던 때에서 '원리'를 밝혀내는 현재의 과학으로 나아오게된 사이 일어난 인류의 꿈틀거림을 나는 믿는다. 불완전하고 부정직한 오늘날, 천문학적인 우리 삶을 회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희망을 품기 위해, 두 눈을 우주로 향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