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족의 기록에서 역사로
<Position among the Stars>
디뷰어: 김현정
레오나르드 레텔 헴리히 Leonard RETEL HELMRICH |전체관람가|110분|네덜란드/인도네시아|2010
12년간의 기록, 그 마지막
나에게 인도네시아는 그리 가까운 나라는 아니다. 부끄럽게도 인도네시아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주변 친구들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전부다. 말레이시아 친구에게선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사이의 분쟁이야기를 들었고, 그로 인해 인도네시아는 자원과 인구(에 더해 무력)를 바탕으로 동남아시아의 맹주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인상이 깊게 새겨졌다. 이보다 더 전에는 친구의 여자친구가 인도네시아인이었고, 그 친구가 이야기하는 인도네시아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인도네시아는 '어느 정도 잘 사는 나라'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다큐를 본 후, 이리 저리 인도네시아에 대해 짤막하게 공부해보았지만, 여전히 큰 그림은 정확히 그려지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다큐에 드러난 모습은 인도네시아가 보여주고 싶지 않은 민낯의 한 부분이라는 거다.
<내 별자리를 찾아서>는 감독인 레오나르드 레텔 헴리히의 3부작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작품이다. 1부인 <태양의 눈>과 2부인 <달의 형상>을 보지 못했고 아쉽게도 D-BOX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감독이 12년간 인도네시아의 한 가족과 함께하며 촬영한 다큐멘터리의 마지막인 만큼,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들이 응축되어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1부와 2부의 이야기를 간략히 간추리며 시작한 3부는 도시의 생활에 환멸을 느껴 고향으로 돌아간 어머니(Rumidjah Sjamsudin)를 아들 박티(Bakti)가 그의 조카(이자 어머니에겐 손녀가 되는) 타리(Tari)를 위해 다시 자카르타로 모셔오면서 시작된다. 1,2부를 봐야지 더욱 자세한 이야기를 알 수 있겠지만, 타리는 겨우 다섯 살 이었을 무렵 난리통에 부모님을 잃었다. 그 후 유독 할머니를 따랐지만, 할머니는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했고, 울고불며 할머니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타리를 겨우 기차에 태워 보내는 것으로 2부는 끝을 맺는다. 그리고 꽤나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그 기차역에서 다시 가족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한 량짜리 기차가 멈춰섰던 그곳. 손녀 타리를 슬픈 마음으로 떠나보내야 했던 그 자리에서 다시 기차를 멈춰 세우고자 하지만, 늘어나버린 기차의 칸 수 만큼 흘러버린 세월. 기차는 야속하게도 멈추지 않고 오히려 그녀를 질책하며 빠른 속도로 그곳을 지나쳐간다. 도시의 야박함에 지쳐 도시를 떠나왔건만, 가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돌아가는 첫 발걸음마저 녹록지 않다.
허울뿐인 도시의 삶
시간이 멈춘 듯 정체되어 있는 곳은 시골이고, 도시는 변화의 상징인 것처럼 불리우지만, 어째 도시는 바뀐 것이 없어 보인다. 기차는 길어졌으며, 건물은 높아졌다. 정부는 비싼 기름 대신 값싼 가스를 사용하도록 권장하고, 일정 조건을 충족하는 빈민들에게는 보조금 혜택을 주고, 돈이 없어 대학에 가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 제도를 마련해 학비를 지원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허울뿐이라는 것은 그리 깨닫기 어렵지 않다.
마을 주민대표가 된 박티는 심혈을 기울여 주민대표 표지를 걸어두지만, 그저 약간의 위안을 위한 것일 뿐, 국민을 섬기는 정부는 없음을 그 역시 씁쓸하지만 잘 알고 있다.
공정한 운영을 위한 목적도 있겠으나, 누군가는 떵떵거리면서 살아갈 때, 보조금을 받기 위해 어렵게 찾아온 이들의 집을 직접 방문해 그 적은 보조금조차 주지 않으려 한다. 화면이 뿌연 TV와 오토바이가 사치품에 해당되니 보조금을 받기 위해 물건을 모두 치우고 어설픈 거짓말을 하는 모습은 그저 씁쓸하다. 오히려 그 거짓말이 들키지는 않을까 걱정이 된다. 정부에서 나눠주는 돈을 하늘로 흩뿌리고, 떨어지는 돈을 줍기 위해 사람들은 들개처럼 달려든다. 돈을 위해 거짓말을 하고, 거칠게 달려들어도 그들은 저 위 어디에 있는 사람들처럼 추악하지 않아 보인다.
무슬림이 87%를 차지하는 세계 최대의 이슬람 국가인 인도네시아에서 장학금의 기회는 무슬림들에게만 돌아간다. 그것도 종교세를 낼 수 있는 무슬림들에게 말이다. 실상이 정확히 어떠한지는 다큐만 봐서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타리가 찾아간 그곳은 가톨릭 신자인 타리에겐 너무나 버거운 곳이다. 경제문제, 종교문제, 사회문제, 세대문제 모두는 얽히고 설켜 가족을 옥죈다. 주변 친구들이 전부 이슬람교라는 이유 때문에 개종한 삼촌과 달리 타리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할머니를 따라 가톨릭교를 유지하지만, 왜인지 젊은 세대들에게 더이상 종교는 경제문제보다 중한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대학 진학을 위해 학비는 받고 싶지만 개종하기엔 마음이 걸리고, 좋지 않은 집안 형편을 알면서도 다른 친구들처럼 꾸미고 다니고도 싶고, 자신의 교육을 위해 헌신하는 가족들이 고마우면서도 왜 경제적으로 더 도와주지 못하는지 불만이며, 또 한편으로는 대학공부에 그리 흥미가 없음에도 가족들의 기대 때문에 공부를 해야하는- 이 모든 복잡한 마음들을 다 감당해내기에 타리는 아직 어리다.
하지만 사실 나이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무리 나이가 들고 세상을 더 알아가도 복잡한 감정을 다 다스리기에 인간은 언제나 부족하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이 왜 공평하지 못하게 누군가에게만 일어나야 하는지, 억울한 심경은 더해 가기만 한다. 타리뿐만이 아니라 타리의 삼촌 박티, 그리고 할머니까지. 모든 세대는 그 복잡한 마음을 품고 공평하지 못한 세상 속을 살아간다.
참고 견디는 것이 성숙한 인생일까
다큐 초반에 나왔던 두 팔이 없지만 밝은 모습으로 생계 유지를 위해 노력하는 여성은 뒤에 타리와 스치듯 만나게 된다.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한것이 늘 불만이었던 타리는 택시 안에서. 그리고 두 팔이 없는 여성은 그 택시들 사이를 걸어다니며 구걸하던 중에. 타리는 동전을 꺼내어 그녀에게 준다. 감사 인사를 하며 지나가는 그녀를 쳐다보는 타리의 심정은, 아마 다큐가 의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저렇게 더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 지금 내가 가진 것에 행복해야 한다'와 같은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참고 견디고 인내하는 것이 정말 성숙한 인생일까? 속세의 것에 미련을 버리고 해탈하고 열반에 이르는 것이 완전한 인간의 한 모습일 수 있겠지만, 나는 언제나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왜 누군가는 편안히 잘 살아야 하고 누군가는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걸까. 마음을 다르게 먹으면 그 가난은 가난이 아니게 될 수 있지만,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 가난과 그 억울함을. '왜 우리만 가난해야 하는가?' '왜 우리만 이렇게 참으며, 물질이 다가 아니라는 말로써 스스로를 위로해야 하는가?' 왜 부자들은 물질이 다가 아니라는 말로써 그들을 위로하지 않으면서 왜 가난하고 힘들게 살고 있는 자들만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인가?
물론 이 모든 것이 쉽게 해결되지 않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공산주의가 답이 아니라는 것쯤은 또한 당연히 알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명쾌한 해답을 줄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문제를 해결해주지도 못하면서 내가 이런 말을 꺼내보는 것은, 그저 차마 다른 사람들이 꺼내지 못했던 불만을 토로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는 선한 자가 악한 자를 결국에는 이기지만, 이 세상에서 악한 자는 너무나도 활개를 치고 다닌다. 선한 자들은 그러한 상황에서 스스로를 성찰하며 지낼 수 밖에 없는 이 현실이 너무나도 기형적이면서, 동시에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는 점에서 나는 늘 답답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또한 자본주의, 물질만능주의에 물들어 더욱 소중한 것을 잊으면 안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 지점은 늘 생각하는 문제지만, 여전히, 늘 어렵다.
다큐는 내가 가진것에 대해 돌아보게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나보다 더 어렵게 살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와 같은 생각은, 어느 시점부터 내가 스스로 그만두게 된 생각이다. 남과 비교하여 자신을 위안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도 '타리나 두 팔이 없는 여성처럼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 내가 이렇게 내 방에 앉아서 노트북으로 리뷰를 적고 있는 이런 것 하나에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가 아니라, 순수하게 내가 가진 것에 대해 돌아보고자 한다. 내가 너무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작은 것 하나를 놓치지 못해 욕망에 사로잡혀 계속해서 더 많은 것을 움켜쥐려고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하지만 말했듯이 이러한 문제는 늘 어렵다. 고향에 다시 돌아온 타리의 할머니. 그녀는 매번 땔감을 구하기 어려우니 가스통과 버너를 들고 와 그녀와 고향에서 함께 지냈던 친구에게 자랑을 한다. 자식들이 다 성공하였고, 조카들도 많으니 돈이 많겠다며 부러워하는 그녀에게 친구는 항상 돈 생각만 하지 말라며 충고한다. 일반적인 시선에서 돈이 많아보이지도 않을 뿐더러 돈이 그렇게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 곳에서 돈이 많겠다며 부러워하는 모습은 참으로 아이러니하고, 그녀가 돈에 대한 걱정을 얼마나 많이 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문제는 우리에게도 어렵듯이, 음식과 건강, 인생에 만족하며 산다는 친구의 말에 복잡한 얼굴을 내비치는 그녀에게도 어려워 보인다. 우리는 음식과 건강, 인생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아갈 수는 있겠지만, 대학에 가고 싶고, 좋은 옷을 입고 싶고, 몸이 조금 편안했으면 좋겠는 욕구들도 다 우리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과해지는 것은 분명 문제지만, 완전히 무시해버리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감히 질문해본다.
한 가족의 기록에서 역사로-
다큐는 그렇게 한 가족이 실제 삶 속에서 겪는 일들로 인도네시아 전체의 상황을 대변한다. 아니, 대변한다는 말 보다는 그들 하나하나의 상황이 곧 인도네시아 전체의 상황이 된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듯 싶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종종 역사는 큰 흐름에서 쓰이고, 사람들 역시 그런 큰 흐름을 역사라 부르며 배워나가곤 한다. 그러나 이 가족의 이야기는 나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고, 또 그들이 어떤 큰 일을 한 것이 아님에도(그렇지만 삶에는 경중이 없다고 나는 믿기에, 그들이 이 다큐에서 보여주는 것 하나하나가 다른 것들과 비교해서 떨어지거나 더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히 역사의 기록이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우리의 삶은 그저 작은 하나의 것에 불과해보이기도 하겠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그렇게 역사를 살아가고 있다.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한국의 시국은 우리가 역사를 살아가고 있음을 더 잘 일깨워 주고 있는 듯 하다) 역사학계에서 생활사연구가 최근 들어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는 점 역시 이에 대한 성찰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싶다. 특정 인물이나 중요한 사건 위주의 연구가 기록이 적게 남아있는 생활사에 비해 더욱 연구가 쉬웠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이러한 변화는 반갑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우리는 역사란 큰 흐름만을 의미한다고 은연중에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영화나 소설, 드라마, 만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스토리텔링은 주로 누군가의 사적인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들의 삶에 역사가 끼어드는 것 같아 보이지만, 결국 그들의 삶 자체가 역사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몇년 전 화제가 된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과 같은 책은 이런 우리의 굳어있는 사고방식을 깨뜨려주고, 개인과 역사가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를 알려주는 듯 하다. 특히 다큐멘터리는 그 장르적 특성인 사실성을 더해 사적인 기록을 역사화하는 데 마법과도 같은 능력을 지녔다. 아무도 찾아주지 않을 것 같은 인도네시아 한 가족의 이야기는 그렇게, 역사가 되어 우리에게 보여지고 있었다.
Position among the Stars
험난한 세상 속에서 나의 자리는 어디 있는지, 아득하기만 하다. 별 사이에 있는 내 자리. 모든 이들이 별 사이 그들의 자리를 찾을 수 있기를, 별에게 간절히 기도해본다.
덧. 다큐의 내용과는 조금은 관련이 없는 이야기를 해보자면, 레오나르드 감독이 이토록 한 가족을 오랜 시간 카메라에 담아두고자 했던 것은 그가 인도네시아 혈통인 것과 관련이 아예 없지는 않을 것이다. 인도네시아 혈통의 네덜란드인 감독. 그리고 17세기 제국주의 시절 인도네시아를 오랜 기간 식민지로써 점령했던 네덜란드. 감독은 어떠한 생각으로 이 가족과 함께했을지가 참 궁금하다. 오리엔탈리즘에서 벗어나기 힘든 요즘의 다큐판에서 과연 이것이 극복 가능한지를, 인도네시아 혈통의 네덜란드인이 다루는 인도네시아 다큐란 점에서 이 주제를 깊이 다뤄보고 싶지만, 이미 너무 길어져버린 리뷰여서 이곳에선 생략하였다. 관심이 있다면, 이를 탐구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D-BOX > 디뷰어의 시네마천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웃 오브 패션 (0) | 2017.01.15 |
---|---|
존 버거의 사계(The Seasons in Quincy, 2015)- 그를 기억하는 방법 (1) | 2017.01.07 |
아버지와 벌과 나 – 하필 고집스러운 입술이 닮아서 (0) | 2017.01.03 |
EIDF/D-BOX 다큐멘터리 <조나스의 뒷마당 서커스> (0) | 2017.01.02 |
낯선 천국 – 죽음 이후의 불확실성이 아닌 (0) | 2016.12.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