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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OX/디뷰어의 시네마천국

존 버거의 사계(The Seasons in Quincy, 2015)- 그를 기억하는 방법

존 버거의 사계 (The Seasons in Quincy: Four Portraits of John Berger, 2015)

콜린 맥케이브, 틸다 스윈튼, 크리스토퍼 로스, 바르테크 지아 도시 Colin MacCabe, Tilda Swinton, Christopher Roth, Bartek Dziadosz



디뷰어 : 박혜경



‘존 버거의 사계’는 제목 그대로 겨울에서 부터 가을까지 각기 다른 계절 속, 각기 다른 감독들이 자신이 경험한 존 버거의 모습을 그려넣은 옴니버스식 다큐멘터리이다. ‘듣는 방법(Ways of listening)’, ‘봄(Spring)’, ‘정치를 위한 노래(A song for politics)’, ‘추수(Harvest)’라는 네개의 단편이 공유하는 90분의 존 버거라는 인물은 그의 프로필 속 다양한 수식어 만큼이나 복잡하고 어렵다. 그래서인지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면 다소 당황스럽다. 그의 잠언 몇개를 기억하는 것 만으로 이 작품을 ‘봤다’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어떻게 해야 이 작품을 ‘봤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여러 방법이 있을수 있겠지만, 내가 이 작품을 비로소 ‘봤다’고 느낀 때는 90분인 이 작품을 서너시간에 걸쳐 봤을 때였다. 마음을 울린 부분마다, 어렵다고 생각한 부분마다 일시정지를 누르고 종이에 마음을 울린, 그러나 쉽게 잡히지 않는 그의 목소리를 적고나서 왜 이런말을 했는지 고민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나서 재생 버튼을 누르면 신기하게도 그의 목소리가 새로 들린다. 그리고 서너시간 동안 일시정지와 재생 사이에서 종이가 만족(滿足)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이 작품을 ‘봤다’고 말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러나 자신감이 내가 이해한 내용을 ‘정확하다’고 보장하지는 않는다. 어떻게 예술작품에 단 한 가지 정답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경험을 기반으로 성장해간다(standing on each other's shoulder)’는 틸다 스윈튼의 이야기에 힘을 얻어 내가 본 이 작품에 대해 써 보려 한다. (혹여 이 글을 읽고 의견을 수정하거나 덧붙이고 싶은 분이 계신다면 덧글로 남겨주시기를 바란다. )



1. 듣는 방법(Ways of listening)



‘듣는 방법’은 약 25분 길이의 단편으로 퀸시의 겨울을 배경으로 틸다 스윈튼과 존 버거의 대화를 담고있다. 34년 간격으로 같은 날, 같은 도시에서 태어난 틸다 스윈튼과 존 버거는 서로를 쌍둥이라고 여길 정도로 공통된 정서를 공유한다. 그리고 그러한 정서는 25분동안 연주되는 배경음악에서 비유적으로 나타난다.

낮은 음색의 현악기와 높은 음색의 현악기는 그 음의 격차와 서로 다른 리듬이 품고 있는 긴장을 이용해서 조화로운 음악을 만들어낸다. 높은 현이 종종걸음으로 달려갈 동안 낮은 현이 큰 보폭으로 산보하며 그 진행에 동행하는가 하면, 낮은 현이 강하게 발을 구르는 동안 높은 현은 공중을 날며 낮은 현의 주장을 조감(鳥瞰) 한다.

영상이 보여주는 틸다 스윈튼과 존 버거의 관계도 이와 같다. 그 둘 사이에 존재하는 세대의 격차는 그들을 멀게 만들기보다 그들이 서로에 귀 기울이고 성장하도록 만들어준다. 존 버거를 가리켜 스윈튼이 ‘급진적이고 민주적인 인본주의 경향을 지녔다’고 소개할 때, 그녀가 영화 밖에서 어떤 운동들의 전선에 나가있는지 들어본 사람들이라면 그것은 존 버거에 대한 소개 일 뿐만 아니라 스윈튼 자신에 대한 소개인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마치 배경음악이 ‘현악기’이라는 공통의 뿌리 속에서 다름을 통해 조화를 만드는 것처럼, 세계 대전에 참전한 군인을 아버지로 둔 그 둘의 대화는 어느 때는 화음을, 다른 때는 불협 화음 속 긴장을 해소해 나가며 서로를 성장시킨다.

존 버거는 스윈튼에게 이렇게 말한다. “침묵도 훌륭한 소통 수단이 돼.”

그 말을 듣고 스윈튼은 이렇게 말한다. “어떤 종류의 침묵은 개인적으로 견디기 어려워요.”

스윈튼이 말하는 침묵의 측면은 말하지 않음으로서 경험을 물려줄수 없게되는일이다. 호기심과 앎의 필요성이 존재하기에, 존 버거의 말대로 ‘역사의 혀를 자를 수 없기’에 단절을 가져오는 침묵에 저항하는 것이다. 비록 침묵을 깬 결과가 상처를 입는 것이라해도, 생각이라는 사지(四肢) 중 일부가 잘려나가는 것이라해도, 앎의 전장에서 돌아와 삶을 지속시키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의 축적에 대해 나눈 이야기는 두번째 단편의 “각각의 사자는 사자였다.”라는 명제와도 이어진다.



비판적으로 수용하며 듣는 스윈튼의 듣기는 적극적인 듣기이다. 그리고 그 의견에 대해 존 버거는 “그래”라고 긍정한다. 이 역시 자신을 성장시키는 적극적인 듣기이다.  ‘저항은 0으로, 강요된 침묵으로 떨어지기를 거부하는 것이다.’라는 그의 글은 이러한 적극적인 듣기의 결과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적극적인 듣기는 여태껏 들리지 않던 이야기들을 담아낼 수 있도록 한다. 그림을 그리는 이유에 대한 그의 설명에 그 예가 담겨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무언가를 다른 이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계산할 수 없는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그것과 동행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사과를 그린 그의 작품은 단순히 ‘사과’를 다른 이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그린것이 아니다. 사과라는 생명체의 물질적, 경험적 증거같이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계산할 수 없는 예술의 목적지에 이를 수 있도록 동행한 결과이다. 존 버거가 그린 사과는 각각의 사과 중 하나이겠지만 그 그림을 통해 발견하는 것은 사과라는 종(種)의 영속적 속성-가령 형태의 아름다움, 생명력 등-인것처럼 말이다.



2. 봄(Spring)



‘봄’은 약 19분의 단편으로 존 버거의 부인인 베벌리의 죽음 이후에 제작되었다. 이 다큐멘터리의 특이한 점은 ‘네 가지 존 버거의 초상(Four portraits of John Berger)’이라는 전체 작품의 부제와 어울리지 않게 존 버거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현재의 그를 비추기 보다 그가 책과 매체들을 통해 전달한 생각을 ‘봄(Spring)’,  ‘역각도(Reverse angle)’, ‘어머니(mothers)’, ‘잘 있어요(Au revoir)’라는 소주제 안에 담고 있다.

세상은 봄으로 변했지만 베벌리의 죽음으로 인해 존 버거의 집 안에는 아직 겨울이 머물고 있다. 세상에는 생명체가 생동하고 있지만 존 버거는 생동하는 생명들 속에서 죽음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는 또한 그 죽음 안에서 영속을 발견한다.


“동물은 지평선 너머로부터 왔다. 저곳에 속해있다가 이곳에 왔다. 유한하고도 무한한 존재다. 동물의 피는 인간의 피와 똑같이 흘렀다. 그러나 종은 죽지 않았다. 각각의 사자는 사자였다. 각각의 소는 소였다. ”


하나의 점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져서 선을 만들듯, 하나의 픽셀이 모여 화면을 구성하듯, 각각의 존재들은 자신이 속해있는 종(種)의 영속성에 기여한다. 유한한 존재의 경험 그 자체가 누적되고 쌓여서 그 존재가 속해있는 종(種)이 무한해 질 수 있다. 그렇기에 각각의 사자는 단순하고 유한한 개체로서 ‘사자’일 뿐만 아니라 무한한 종(種)으로서 ‘사자’이기도 하다. 따라서 ‘여우, 여우들’이라는 병렬이나 ‘각각의 소는 소였다.’라는 명제가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소작농에게  동물은 깨어지지 않는 영속된 존재입니다.

소를 도살하면 다른 소가 그 자리를 채우죠. 주로 같은 이름을 붙입니다.
따라서 양떼가 자신보다 수명이 길다는 것은 양치기도 알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들을 존 버거는 ‘실존적 이원론’이라고 설명한다. 유한한 개체를 인식하는 동시에 무한한 종을 인식하는 것. 동물을 다루는 인간들의 행위에 이러한 실존적 이원론은 두드러진다고 설명하는데 예를들어 이런 태도들 말이다.



‘각각의 소’ 처럼 유한한 개체로서의 동물은  주체화되고(subjected), 살찌워진다.

‘소’처럼 무한한 종(種)으로서의 동물은 숭배되고(worshiped), 제물로 바쳐진다.

개체는 유한하지만 종(種)은 무한하다.

그렇기 때문에 소작농은 무한한 돼지에게 정이 드는 동시에, 유한한 돼지를 죽여 고기를 비축할 수 있는 것이다.



35분쯤 등장하는 페페라는 인간이 메메라는 돼지를 도살하는 이야기 속에서  인간은 종으로서의 ‘돼지’를 바라본다. 돼지라는 종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도살이라는 행위 속에 담긴 죽음은 사소한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돼지, ‘메메’의 관점에서 묘사는 개체로서, 유한한 생명으로서의 것이다. 자신의 죽음은 곧 세계의 끝인것이다. 그렇기에 평생을 순종으로 살아왔음에도 마지막의 순간에는 거친 저항을 보인다.


‘봄’의 두번째 소주제인 ‘역각도(reverse angle)’에서는 동물의 시각에서 인간을 바라보게된다.

동물의 삶과 인간의 삶은 그리 다른 것이 아니다. 태어나고 경험하고 죽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다른 종(種)으로 인식되며 배제되는 것은 그 둘 사이에 공통된 언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통언어의 부재는 동물이 인간을 인식할 때 벌거벗은것 처럼 날것 그대로의 인간을 볼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가 동물을 주체화하여(subjected) 바라보듯이 말이다. ‘역각도’의 이야기 끝에 기린의 모습을 관조하듯 붙여놓은 것은 동물에 대한 인간의 이러한 태도를 말하려는지도 모른다.



‘봄’의 세번째 소주제인 ‘어머니(mothers)’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두번째 단편을 감독한 크리스토퍼 로스는 자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신것, 그리고 어머니의 어머니가 돌아가신것과 함께 20년간 고기를 먹지 않았고, 현재는 생선도 먹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덧붙인다. 베벌리의 죽음 이후에 찍힌 이 영화의 맥락을 생각할 때, 육식을 하지 않은것, 생선을 먹지 않는것, 그리고 감독 자신 가족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인간의 죽음과 동물의 죽음을 이해하고 묘사하려는 시도로 이해된다. 그러나 그 죽음은 단순한 끝이 아닐 것이다. 앞에서 제시한 ‘각각의 사자는 사자였다, 각각의 소는 소였다’라는 말 처럼 각 개체의 죽음이 종의 영속성에 의해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동물의 죽음에 대해 존 버거는 이렇게 말한다.


“베벌리, 내가 보기에는 동물들이 이주하는 것 같아.

조심성이 많은 들쥐는 은하수를 선택했을거야.”


컬러로 바라보았던 베벌리가 흑백으로 변한것은 그녀의 죽음을 기리는 감독의 의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죽음이 끝으로만 존재하는것이 아니기에, 또한 ‘각각의 소는 소였다’ 처럼 베벌리가 남긴 상념과 속성들을 믿기에 마지막 두번째 단편의 마지막 소주제를 ‘잘 있어요(au revoir)로 닫지 않았나. 싶다.





3. 정치를 위한 노래(A song for politics)



‘정치를 위한 노래’는 약 20분의 단편으로 두 장소의 영상이 교차되어 가는 형식을 가지고 있다. 알프스의 미우시에서 현재 정치에 대해 토론하는 장면이 그 중 하나이고, 토론장 밖에서 일어나는 노동의 모습이 또 다른 하나이다. 눈에 띄는 것은 그 두모습이 흑백과 컬러로 대조되듯이 병렬되어 있다는 점인데, 마치 ‘녹화’라는 방법으로 박제되고 있는 것은 흑백으로, 녹화 외의 박제되지 않는 장면들은 컬러로 표현하여 이념과 실제, 이상과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다.

정치 토론에서 사회를 맡은 것은 첫번째 단편 ‘듣는 방법’과 세번째 단편 ‘정치를 위한 노래’를 공동감독한 콜린 맥케이브 감독이고 패널로 참석한 사람 중 하나가 두번째 단편, ‘봄’을 감독한 ‘크리스토퍼 로스’이다. (혹시 영화가 어렵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이 두사람 얼굴을 잘 봐두시라)



마르크스주의자인 존 버거의 지향을 보여주는 가장 극명한 단편이 아닐까 싶을정도로 토론 속의 그는 단호하게 이야기 한다.


“행성의 자원을 이용, 개발, 조직할지에 대한 결정을 소수의 투기꾼들이 점령하고 있다. 민주주의 국가의 지배체계, 정치권력자의 권력은 줄어들었고 실제로 그들은 무능하다.  그들에게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데 반론을 제기하지 않은 것은 부끄러운일이다.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


“희망은 낙관주의와 아무 상관이 없다.”


“산문의 언어들이 신뢰를 잃었으므로 이 세상사를 묘사하기 위해 필요하는것은 노래다.”


이런 정치적 담론이 이루어지는 실내와, 실외의 노동이 교차되는 사이 문득 실내의 정치토론이 무기력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모여 같은 방향의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필요한것이라고, 존 버거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연대가 중요한 곳은 지옥이지, 천국이 아니에요.”


지옥같은 현실에서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배워나가야 한다는 것이 퀸시에서 40여년 넘게 머물면서 배운 그의 깨달음 이리라. 이상이 이루어지기에 충분치 않은 현실에서, 제 7의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그의 생각 역시 이에 맞닿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4. 추수(Harvest)



‘추수’는 약 24분의 단편으로 첫번째 단편에 등장했던 틸다 스윈튼이 감독한 작품이다.  틸다 스윈튼의 두 자녀에게 존 버거가 이야기하는 장면으로 작품이 시작된다. 존 버거는 아이들에게 시간과 공간을 바라보는 축에 대해 이야기 한다. 이는 첫번째 단편에서 역사를 인식하는 그의 모습과 겹치는 부분이다. 첫번째 단편 ‘듣는 방법’에서 그는 이렇게 얘기했다.


“만약에 순간(moment)을 산다면, 그걸 제대로 인식한다면 굉장히 광활하거든.”


네번째 단편에서 다시 언급되는 존 버거의 ‘순간을 살아간다는 것’은 좀더 구체화되어 ‘확장’의 개념으로 나아간다. 아이들 앞에서 그는 현재를 살아가는것에 대해 “끝없이 방대한 순간”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퀸시같은 마을에서 그 확장을 수직적으로 일어난다고 말한다.


이 개념을 계량화  해서 이해하자면  x축은 공간범위를, y은 시간의 진행으로 생각하면 쉽다. 그래프로 나타내면 아마 이렇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출처: Modelling accessiblility using space-time prism concepts within geographical information systems,

written by Harvey J. Miller)


지리적 공간은 x축의 면을 담당하여 존재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공간이 그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통행 가능 공간은 그 넓은 지리적 공간 중에서 실제적으로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범위이다. 지구가 존재한다고 해서 순간에 지구라는 공간 전체를 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지리적 공간 안에 통행 가능한 공간은 일정한 범위로 제약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다만 자동차가 있는 사람과 자전거가 있는 사람의 통행 가능한 공간의 범위는 달라질 것이다. 자동차가 있는 사람이 자전거가 있는 사람보다 더 넓은 통행 가능한 공간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이 x축 위로 누적되는 것이 y축인 시간이다.


존 버거가 이야기한 ‘인터넷 시대에 광활한 순간을 살게된다’라는 것은 인터넷을 통해 접할 수 있는 정보의 범위가 세계적이기에 그 ‘통행가능한 공간’의 범위가 넓혀졌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퀸시에서의 확장이 수직적’이라는 것은 지리적 범위가 제한된 퀸시라는 공간에서 그 확장은 시간이 누적되고 경험이 전달되며 발전된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추수’의 시작이 존 버거의 시·공간적인 확장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것은 단편이 담고있는 동선과 등장하는 인물들의 관계 때문일 것이다. “‘자녀’라는 개념은 수직적 연속성과 관련되어 있어.”라는 존 버거의 말처럼 스윈튼의 자녀들과 존 버거의 자녀는 퀸시라는 공간에서 선대에 있었던 우정을 연결해 나가는 것이다. 스윈튼의 인생에서 존 버거를 향한 여정은 그녀의 고향인 스코틀랜드에서 시작하여 퀸시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경험의 연속성은 그녀의 자녀들이 선물을 들고 스코틀랜드를 거쳐 퀸시로 가는 여정을 통과하는 동안 반복되고 누적된다.

두번째 단편’봄’ 처럼 ‘수확’도 작은 부분들로 나뉘어져있다.


시작은 From이다. 스코틀랜드에서 틸다 스윈튼의 두 자녀는 선물을 준비한다.


중반은 Via이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존 버거에게 들러 그 선물을 전달한다.


마지막은 To이다. 다시 퀸시로 돌아가 존 버거의 아들 이브를 만나 선물을 전달한다.



스윈튼의 아이들이 전달한 선물은 계란이었다. 앞선 세대의 결과이자 다음 세대의 시작점으로서의 계란.



퀸시의 풍경 곳곳에서 존 버거의 아들 이브는 노동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그는 뜰 위에 자라난 나무에서, 헛간의 기둥들에서 숨겨져 있는 노동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그리고 헛간의 건초를 통해 시간의 순환을 배운다. 이러한 그의 말들이 앞서 언급된 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존 버거와 ‘각각의 사자는 사자였다.’라고 말한 존버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존 버거의 사계’가 틸다 스윈튼과 존 버거의 만남에서 시작해서 그녀의 자녀들과 그의 자녀들이 만나는 모습으로 끝을 맺는 것은 경험을 연속시키는 ‘듣는 방법’의 주제와, 일개의 동물과 종(種)의 영속성을 이야기한 ‘봄’의 주제와, 노동과 연대를 이야기한 ‘정치를 위한 노래’의 주제와, 자녀세대를 통해 기억되고 발전하는 모든 주제를 아우르는 의미를 갖는다.




작고한 존 버거의 아내 베벌리가 가꾼 산딸기를 그 자녀들이 먹고 베벌리를 기억하는 장면이 있다. 산딸기를 먹는 다음세대의 즐거움이 베벌리에게 전해질 거라고 말한 존 버거의 이야기가 최근들어 특히 의미있게 느껴지는 것은 지난 3일 그가 작고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자화상을 찬찬히 들여다본 지금 그의 죽음은 결코 단절의 의미하는것이 아니라는것을 깨달았다. 두번째 단편인 ‘봄’이 그의 모습없이도 그의 모습을 그려낸 것처럼 존 버거의 경험을 관찰하고 생각하며 함께 이야기하는 것은 그를 확장 시킬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