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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OX/디뷰어의 시네마천국

불리(Bully)

불리(Bully)

리 허쉬 Lee Hirsch


디뷰어 : 박혜경






5교시는 음악시간이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음악실로 향했다. 아직 음악실 문이 열려있지않아 음악실 복도 끝 좁은곳에 아이들이 모였들었다. 그리고 음악실 문이 열리기 전까지 10분도 채 되지 않는 그 시간에 일이 일어났다. 한 아이가 다른 아이의 뺨을 때렸다. 때린아이는 당당했고 맞은 아이는 괜찮아 하려 했다. 허세에 부푼 내 정의감은 때린아이에게 비난의 말을 했고 그걸 들은 때린 아이는 방금 후드려친 자기손만큼이나 거친 말을 내게 뱉어냈다. 여러개의 쌍시옷으로 후드려맞은 나의 정신은 바람빠진 정의감과 자존심을 가까스로 추스리느라 바빴고 그 사이에 5교시 시작종이 울렸다. 순식간에 학급의 분위기는 때린아이가 그럴만했다는 식으로 흘러갔다. 그 사건에 대한 기억은 그렇게 끝이다. 지금서 생각해보니 그 일은 선생님께 얘기되지도, 해결되지도 않았다. 그냥 시간이 흘러서 우연치않게 “불리”라는 다큐멘터리를 보고 내가 겪은 비슷한 일을 떠올려보니 그 일이 생각난것 뿐이다.




2011년에 제작된 미국 다큐멘터리 “불리(Bully)”는 제목 그대로 학교 내 괴롭힘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이다. 감독 본인 스스로 학생이었을 당시 학교 내 괴롭힘을 경험했기에 이 다큐멘터리는 더욱 각별히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다큐멘터리를 보고나서 이 작품에 관한 정보를 검색하다가 이 다큐멘터리를 계기로 미국에서 학교 내 폭력에 관한 논의가 활발해졌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누구나가 다 그러려니하고 넘어갔던 일들, 그저 아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일들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이 다큐멘터리를 계기로 사실은 그러려니 할 수있는일이 전혀아니었고 사소한일도 아니었다고 얘기하게 된 것이다. 어떻게 “불리”는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어 낸 것일까.

이 다큐멘터리를 보다보면 어느 부분에선가부터 다큐멘터리를 지켜보는 나 역시 가해자의 일부가 된 느낌을 갖게 된다. 폭력의 장소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채 그저 그 상황을 바라보는 다큐멘터리의 시선은 그 일을 막을 수 있음에도 막지 않는, 그 일에 대한 무언의 동조를 보내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이 점이 “불리”가 다른 다큐멘터리들과 구분되는 특징이 아닐까 싶다. 같은 주제의 다른 다큐멘터리들이 주로 과거의 폭력에 대해 이야기 하는데 비해 “불리”는 과거의 폭력은 물론이고 현재의 폭력까지도 담고있다. 스쿨버스 안에서, 길거리에서, 학교에서 아이들의 폭력을 받아내는 알렉스가 그 현장에 가장 가깝게 연결되어 있다. 알렉스가 괴롭힘 당하는 장면들마다 그 장면을 그저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나는 답답함과 무기력함을 느꼈다. 무언가 나서보려다 아무것도 못했던 음악실 앞의 일이 떠오르기도 했다. 폭력의 현장을 목격자의 입장으로 고스란히 담아낸 것, 폭력의 현재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보여주는 것, 그것이 ‘불리’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이라고 본다.

알렉스가 당하는 폭력의 장면들을 보고 있으면 저 장면을 어떻게 찍었을까 하는 질문을 가장 먼저 던지게 된다. 카메라라는 장치는 사람들을 주저하게 만들지 않나? 어린 학생들이라도 카메라를 든 낯선이가 한 공간에 있다면 자신이 하는 행동을 삼가지 않을까? 그러나 카메라는 알렉스에게 방패가 되어주지 않는다. 아이들은 그것이 마치 일상의 스포츠인양 알렉스를 괴롭힌다. 어떻게 카메라 앞에서조차 그 아이들은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을까. 마침 우연히 읽고 있는 책에서 힌트를 얻었다. 부당한 상황이 지속되게 되면 처음에는 그것이 옳지 않은 것이라고 저항해도 시간이 가면서 ‘그럴만하다’라는 이유를 만들어 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알렉스를 향한 그들의 일상적인 폭력은 어쩌면 그들 안에서 정당화 되어있기에 가능했을지 모르겠다. 부당함이 정당화된 그들의 세계 속에서 알렉스는 이렇게 말한다.

“뭐랄까, 저도 그냥 무감각해진 것 같아요.”

계속되는 폭력 속에서, 피할길이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 알렉스에게는 무감각해지는 것이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알렉스의 그 대답 이후 알렉스의 엄마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다. 만약 알렉스가 그 상황에 무감각해지지 못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아이들에 따라서 부당함에 탈출하려는 방법은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고 본다. 14세의 저미야는 자신을 괴롭혔던 상대에게 더 큰 위협을 줌으로 폭력의 현장에서 빠져나온 예다. 폭력에 무감각해지기 전 가해자들에게 맞서는 방법을 택했다. 그 선택으로 피해자로서의 자미야가 겪게 될 폭력의 현장은 없어졌지만 그녀 자신이 가해자로서 폭력의 현장에 남게 되었다. 스쿨버스에서 자신을 괴롭히던 아이들에게 권총을 겨누며 위협을 한 것이다. 그녀는 그 상황에 대해 ‘겁을 주려고만 했던것이다’라고 얘기 한다. 자신을 괴롭혔던 아이들에게 자신이 받은만큼의 위협과 괴로움을 돌려주고 싶었던것이다.  저미야의 행동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이 상황의 의미를 좀더 살펴보고 싶다. 저미야가 평소에 받던 괴롭힘이 있었다. 어느 순간을 계기로 그 괴롭힘이 사라졌다. 괴롭힘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가해자들에게 돌려주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에서 그 ‘무언가’는 권총이었다.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총이었다. 저미야가 권총으로 가해자들의 생명을 위협한것, 가해자들이 괴롭힘의 지속성으로 저미야의 생명을 위협한 것, 그 둘의 무게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저미야가 총을 들지 않았더라면 저미야를 향한 괴롭힘은 그리 쉽게 끝나지 않았을것 이다.

지속된 괴로움에 익숙해 지거나, 그 괴로움에 반격하거나, 혹은 스스로에게 더한 괴롭힘을 더해 세상과 이별하는 경우도 담겨있다. 피해자들이 그렇게 결말을 맺게 되면 현실에 남겨진 부모들은 자녀들의 괴로움을 풀고자 노력한다. 폭력의 현장이 되었던 학교는 무슨 조치를 취했는가, 학교 내 상담사는 어떤 책임과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가, 학교 내 경찰이 이런 일을 막을 수 있지 않았나, 지역 사회는 어떤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가, 서로의 목소리를 모은다. 어쩌면 그 목소리를 모으는데 가장 큰 구심점을 이 다큐멘터리 제작진이 해냈는지 모르겠다. 남겨진 부모들은 먼저 떠난 자녀들의 괴로움을 세상에 알리면서 이런일이 더이상 발생하지 않기를, 학교내 아이들이 서로에게 보다 더 친절해 지기를 바라면서 다큐멘터리는 마무리 된다.




‘불리’가 담고있는 학교폭력 예방운동행사는 매우 희망적이다. 행사에서 괴롭힘으로 인해 세상을 먼저 떠나간 아이들을 추모한다. 그 추모는 이제껏 피해학생들이 버텨온 괴롭힘에 대한 위로이자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는 행사에 참여한 모두의 다짐이다. 그러나 그런 위로와 다짐에도 불구하고 이 행사는 나에게 희망을 주지 못했다. 작품의 앞에서 보여준 괴롭힘의 현장은 너무나 가깝고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며 일상적인데 비해 그에 대한 예방은 너무나 멀고 모호하고 추상적이며 일시적이다. 이제껏 내가 경험했던 것에 비추어서도 그런 행사의 개최가 모든것을 해결해 주진 못한다. 그렇다, 나도 생각해보면 ‘불리’의 상황이 음악실 앞에서만 있었던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어렸던 초등학교때 역시 비슷한 일들은 많이 일어났다.  배려와 동행이 필요했던 약한 아이들에게 되려 폭력과 괴로움이 가해졌다.  그 아이와 함께 짝지어지거나 어울리게 되는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나조차도 그들과 어울리기를 꺼렸다. 그때의 일이 다큐멘터리 ‘불리’에 담긴다면 그 이야기는 이 영화에서 다른 결을 갖게 될 것인가? 그다지 다르지 않을것이라는게 스스로의 고백이다. 스쿨버스에서 괴롭힘의 옆자리에 무관심하게 앉아있는 학생 한명으로 내 얼굴이 나오게 되어도 이상하지 않다. 성인이 된 지금 그때의 약한 아이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으려나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다. 시간은 흐르고 철없는 악의의 괴롭힘은 멈추었을지 몰라도 그 아이들은 여전히 그때의 일이 상처로 남았을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열대여섯살의 아이들은 서른이 훌쩍 넘은 어른을 괴롭게 할 수 있다.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기억속에서 그 일은 무한히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리’는 과거 가해자의 한명으로서 나 자신을 발견하게 했다. 그리고 괴롭힘이 생길수 있는 장소에 이 다큐멘터리로 서로의 모습을 들여다 보자 말할 수 있는 주제를 제공해줬다. 함께 말하며 공감하는 속에 다큐멘터리속의 가해자와 크게다르지 않은 우리들의 얼굴을 발견하는것, 다큐멘터리의 ‘불리’가 폭력의 현재성을 다짐하고 이루어낸 큰 의미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