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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OX/디뷰어의 시네마천국

퀸 오브 사일런스 (The Queen of Silence)

퀸 오브 사일런스

(The Queen of Silence)

아그니에슈카 즈비에프카  Agnieszka Zwiefka


디뷰어 : 노효섭



데니사라는 한 소녀는 무언가를 중얼거린다. 주변의 아이들은 데니사를 보고 바보라고 하고 미친 여자라고 한다. 그 말들은 데니사에게 닿지 않는다. 데니사는 여전히 중얼거린다. 

의류수거함에서 인형을 꺼내는 데니사는 웅얼거림으로 인형의 세계를 그린다.

인형의 세계를 만드는 데니사의 언어는 우리에게 닿지 않지만 데니사에게는 모든 소리가 와닿지 않는다. 그리고 데니사의 부모는 데니사에게 소리를 찾아주기 위해서 검사를 하고 보청기를 달아준다. 데니사는 귀가 안들리는 채로 오래 살아서 말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









소리를 못 듣는 데니사라는 여자아이는 춤을 춘다.

그저 음악이 나오면 춤을 추고 댄서의 포스터 한 장을 소중히 간직하는 소녀다.

데니사라는 아이는 춤을 추는 댄서의 사진을 소중히 여기는 아이는 춤 대회를 나갔지만 탈락한다.

그래도 데니사는 춤을 춘다. 

대회를 나가서 홀로 스트릿 댄스가 아닌 춤을 추고 나서 길거리 댄서들과 함께 군무를 추고

경찰이 집시촌을 훑고 간 뒤에는 아이들과 장난감 총을 들고 춤을 춘다.









데니사와 그 식구는 집시촌에 사는 집시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일자리를 구할 수도 없어서 쓰레기를 줍고 구걸을 하면서 지낸다. 폴란드의 보수적 민족주의자들은 집시들을 쫓아내려 하고 그 손길은 데니사의 가족에까지 닿는다. 가족은 결국 주민의 신고로 새로운 정착지로 떠난다. 그리고 데니사는 말을 배우지 않아 생계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홀로 마을에 버려진다. 사람들의 말을 배우지 않은 데니사와 데니사의 말을 배우지 않은 사람들 그리고 데니사가 떠난 자리에는 서로의 말을 듣지 못한 채로 보청기만 남아있다.








나는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하루 종일 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말을 하고있지 않을 때에도 나는 나 혹은 누군가의 목소리로 생각을 한다. 가끔은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좋아하는 가수가 가끔 찾아와서는 노래를 불러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다 소리내어 말한다면 사람들은 날 이상한 사람으로 볼 것이다. 나 홀로 내가 삼키는 말들은 내 소리보다 더 할 말이 많다.


 영화에서 데니사는 바디랭귀지를 하면서 계속 웅얼거린다. 데니사는 우리에게 말을 걸고 본인의 생각을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춤을 춘다.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지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춤을 춘다는 것은 안다. 그녀가 눈물을 흘릴 때는 그녀가 서럽다는 것을 알고 그녀가 춤을 추며 웃을 때는 행복하다는 것은 안다. 그리고 춤은 우리와 데니사가 공유할 수 있는 하나의 언어가 된다. 감독은 데니사의 언어를 이용해서 더욱 큰 것을 보여주려 한다. 올바르게 자립할 수 없는 집시들의 삶과 장애인들을 향한 우리의 시선들에 대해서 데니사와 댄서들이 함께 같은 춤을 추면서 강하게 외치고 있다.







연극을 보거나 영화를 볼 때 관객들이 모두 다 떠들고 있다면 우리는 작품을 올바르게 감상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작품을 감상하기 이전에 적막한 상태를 유지하고 감상을 하기 시작한다. 그래야 작품의 소리를 온전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데니사를 적막속의 여왕으로 표현한다. 이는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데니사가 적막 속에 살아서가 집시와 장애인을 대표하는 여주인공으로서 하는 이야기에 더욱 집중하도록 막이 오르기 전에 미리 준비해둔 적막이기 때문이리라.



퀸 오브 사일런스 감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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