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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OX/디뷰어의 시네마천국

이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그림자 속에서 影>

이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影 Of Shadows >



디뷰어: 김현정




추이 이 CUI Yi | 전체관람가 | 79분 | 중국, 캐나다 | 2016





서민의 삶과 애환, 그림자극


'그림자극'이라는 예술공연이 있다는 것을 알게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중국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물론 여전히, 이 그림자극이 그들에게 무슨 의미인지 이방인인 나로써는 완전히 이해할 길은 없으나, 이상하게도 내게 늘 그림자극은 생소하면서도 서민들의 슬픔, 한, 이런 것들이 섞여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요란한 악기소리와 비명에 가까운 높은 곡조의 연기자의 목소리와 노래, 그리고 영웅전과 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과는 정말 상반되게 말이다. 사실 중국 그림자극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그 요란스러움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섬세한 인형의 모습과 이를 능수능란하게 조절하는 연기자, 그리고 울음소리와 같은 노래를 알아듣지 못하여서 왠지 모르게 억울하고 오히려 그래서 더욱 알고 싶어지게 만드는 매력에 반했다. 그래서였을까, 그림자극의 이야기를 다룬 이 다큐멘터리에 자연스레 손이 갔다. 


그러나 이 다큐멘터리는 그림자극에 대한 설명이라든지, 역사라든지, 소개 따위와 같은 내용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오히려 다분히 실험적인 방법으로 만들어진 다큐이다. 하지만 이 다큐멘터리는, 내가 그림자극에 대해 가지고 있는 그 어떠한 씁쓸함을 더욱 잘 표현해주고 있었다. 내가 그림자극에 대해 그렇게 느꼈던 이유는 바로 장이머우 감독의 영화 <인생(活着)> 때문인데, 이 영화에서 그림자극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주인공 푸구이의 굽이치는 파도와 같은 삶 속에서 그가 새로운 인생을 개척해나가고, 아군과 적군을 구별할 수 없는 전쟁터에서 살아남고, 마침내 가족의 곁으로 돌아오게 해주는 그런 존재. 그랬기 때문에, 웃음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 것 같은 전쟁터에서 작은 그림자극 공연을 하며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고, 또 한편으로는 그가 죽임을 당하지 않고 살 수 있게 해준 그림자극이 내게는 서민의 그 어떤 삶에 대한 한과 애착과 같은 것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민간예술-이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중국의 그림자극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을 만큼 그 가치를 높이 쳐주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이 민간예술을 전승하고 직접 행하고 있는 사람들의 삶은 '무형문화재'라는 거창한 타이틀에 가려져 정부의 선전도구 신세로 전락하고 있을 뿐, 그들의 삶은 각종 최신기술을 겸비한 다른 오락거리에 밀려나 나아지는 것이 없어 보인다. 


우리는 무형문화재라고 하면, 나라에서 떠받들어주는 존재와 같다고 생각하지만 조금만 뒤를 돌아보면, 그들이 '문화재'가 될 수 밖에 없었던 현실을 생각해낼 수 있다. 무형문화재로서 보호하는 것은 좋지만, 결국 이를 전승할 사람이 없어 곧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는 현실을 반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히 위기에 처했다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될 듯 하다. 그림자극을 전승할 사람이 없어서 안타까워하는 모습이라기 보다는, 그림자극이 단지 허울뿐인 존재로 남고 있다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바로 이 다큐의 핵심이 아닐까. 


실제로도 과거 중국 서민들의 소중한 오락거리였던 그림자극은 이제 '극'이 아닌 정교한 '그림자인형'에 대한 관심만 남아있다고 한다. 그림자극에 대한 관심은 피어오르고 있지만 예술인들은 정작 극을 공연할 기회가 없다고 한다. 그림자극 예술인들은 그림자극을 전승해나갈 굳은 결의가 있지만 공연의 기회가 적어 어쩔 수 없이 겸직을 하게 된다고 한다. 한 그림자극단의 책임자는 그림자극 인형의 제작과 관련해 도서나 기록된 역사자료가 있는 반면, 그림자극의 공연, 창법의 설계 등은 모두 구두로 전해져오거나 스승이 직접 제자를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그림자극은 현재 '인형'만 있고 '극'이 없는 위기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활발하게 움직여야 할 그림자극 인형이 단지 벽에 걸린 정교하고 아름다운 '작품'이 되는 것은 그림자극 예술인들에게 있어서는 가슴을 치는 일일 것이다. 


그림자극 인형조각기술 전승인 조흥평은 현재 '그림자극 인형의 열기'와 '그림자극의 저조'한 현상은 실제 많은 민간공예의 운반체와 형식이 서로 분리되는 현상의 단면이라고 분석했다. 마치 우리나라의 탈춤과 같은 민간예술에서, '탈'만 남고, 정작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탈춤의 구성이나 형식 등이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상황과 같아 보인다. 사실 '탈'을 본 적은 있어도 탈춤 공연을 본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그리고 다큐는 거대한 행사인 민속문화축제에서 그림자극 공연을 준비하는 단원들의 모습과 그들의 삶을 계속적으로 교차하여 보여준다. 전통적인 그림자극에는 들어가지 않을 그런 노랫가락을 연습하는 모습은 즐거워 보이지만, 연습 뒤의 그들의 모습은 '나라가 부강하고 국민이 부유하네' 라는 흥겨운 노래가사에 반한다. 경제적 문제에 환멸을 느끼면서도 그 환멸에 어찌 대응해볼 수도 없는 그들의 모습이 왜인지 우리와 자꾸만 겹쳐보였다.



    

정부의 명령아닌 명령으로 불려와, 커다란 무대에서 '그림자' 없이 그림자극 공연을 하는 단원들의 모습은 이 괴리감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즐겁지도 않으면서 억지로 술을 흔들어야 하는 학생들의 숨길 수 없는 표정과 달리 그들은 '아주 즐겁고 흥겹게' 개혁개방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른다. 그들을 소개하는 멘트도 너무나 거대하다. 찌푸리는 얼굴이란 존재할 수 없다. 몸에 맞지 않는 듯한 싸구려 전통복장은 뒤의 잘 차려입은 오케스트라의 모습과 대조되며 그 어느때보다 흥겨운 멜로디가 흘러나오지만 그 어느 부분보다 가장 서글프다. 그림자극이지만 그림자와 인형은 없고, 그들의 슬픈 '그림자'만 남았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다시 인기를 얻고 있는 경극과 달리 점점 잊혀져가는 그림자극은 단원들로 하여금 경극 분장을 하고 관객들 앞에 나아가게 한다. 그림자극에 대한 열정만으로는 현실에서의 삶을 이어나갈 수 없는 그들의 모습이, 마치 다큐속 전기가 나간 무대와 닮아 보인다. 그림자극 예술단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경극을 공연하는 그들의 심정을 헤아릴 수나 있을까.


이상과 현실의 괴리 사이에 서 있는 그림자극이 나아가야 할 길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인터뷰 내용이 없는 인터뷰


다큐를 보다보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부분이 있다. 바로 그림자극 단원들의 인터뷰인데, 제대로 된 인터뷰라고 할 것이 별로 없다. 처음에는 이렇게 당시 상황의 모든 것을 담는 것이 다큐의 매력이지 - 하면서 씨익 웃다가 후에는 이것이 감독의 의도라는 것을 눈치채게 된다. 공사장의 소음, 인터뷰 도중 갑자기 내리는 비, 대답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 등으로 인터뷰에는 정작 인터뷰 질문과 대답이 담겨있지 않다. 사실 이는 어찌보면 그네들의 삶과 닮았다. 마땅히 인터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인터뷰의 내용이 없듯이, 그들은 무형문화재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지만 그 속에 진정한 무형문화재로서의 삶은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감독은 꾸밈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림자극 예술인들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조심스레 고발하고 있는 다큐처럼, 잘 차려진 인터뷰가 아니라 그 앞뒤의 상황을 보여주면서 이것이 바로 진짜 '삶'의 모습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 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잘 차려진 모습이 아니라 그 속의 모습을 보아야 하는 것임을, 역설적이게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그림자극 단원들이 잘 차려지고 꾸며진 무대에서 수많은 관중들 앞에서 공연할 때가 아니라, 작은 마을에서 자신들의 이야기에 집중을 해주는 관객들을 위해서 공연했을 때 예술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더 느낀다고 말했던 것 처럼 말이다. 내용이 없는 인터뷰는 그렇게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주고 있었다.




웃음으로의 승화로만 남지 않길








민족문화축제공연을 마친 그림자극 예술단은 진흙으로 가득한 길을 힘겹게 올라간다. 진흙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된 삼륜차 옆에서 쪼그리고 앉아 그들은 공연의 노래가사를 다시 읽어본다. 노래가사와 너무나 다른 그들의 현실 모습에 그들은 웃음을 터뜨린다. 고된 서민들의 삶에서 그들은 웃음으로 승화하는 법을 익혀왔다. 그러나 풍자와 해학, 웃음으로 승화하기에는 그 속의 눈물이 너무 많다.



나는 과연 이 괴리가 웃음으로 승화시킴으로써 잊혀져야 하는 것인지 되묻고 싶다.






<그림자 속에서> 감상하기











중국 그림자극 기사 참조: http://visitbeijing.or.kr/article.php?number=125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