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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DF 2017/EIDF 2017 상영작

[EIDF 2017 스케치] <데이빗 보위: 지기 스타더스트 마지막 날들 David Bowie: The Last Five Years> Doc Concert

 

어느덧 폐막을 하루 앞두고 있는 EIDF 2017! 26일 금요일, 메가박스 킨텍스에서는 20세기 브릿팝과 록 음악계에서 파격과 혁신의 아이콘이었던 데이빗 보위를 추모하는 작품, 프랜시스 웨이틀리 감독의 <데이빗 보위: 지기 스타더스트 마지막 날들> 다큐 콘서트가 진행되었습니다.

이 날 행사에는 성문영 팝 칼럼니스트, 그리고 국내에서 처음으로 데이빗 보위에 대한 책 <데이비드 보위와 그의 영향>의 발간을 추진했던 박지니 편집자가 참여했습니다. 상영관에는 여느 때보다도 많은 관객 분들이 찾아주셨습니다. 그만큼 데이빗 보위라는 아티스트가 대중들에게 끼친 영향이 적지 않았던 까닭일까요? 상영이 끝난 후 극장에는 한동안 관객들의 박수 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성문영: 다큐멘터리, 잘 보셨는지요? 방금 보신 것과 같이 이 다큐는 BBC에서 데이빗 보위의 죽기 마지막 5년간을 포착해서 영상으로 만든 것입니다. 사실 그의 인생은 길이 면에서나 양에서나 모두 적지 않은데, 5년만 캡쳐했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지만, 역시나 BBC가 가지고 있는 데이빗 보위의 젊었을 적 비디오 자료가 많아서 데이빗 보위의 일생 전반을 돌아보기에도 부족하지 않은 느낌이었습니다.

사실 그 5년이라는 시간이 어떻게 설정되었는가에 대해서 조금은 설명이 가능한데요. 실제로 보위 자신이 비주얼적으로 완성 단계에 도달했던 <지기 스타더스트>의 시기, 그 때 발표된 앨범에 “5 Years”라는 곡이 있습니다. 그 노래 가사가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5년 남았다는 내용이거든요. 데이빗 보위 역시 남은 생을 5년으로 가정하고 곡을 썼구요, 그 탓인지 데이빗 보위 사후에 여러 대중 매체에서도 유독 “5이라는 특정한 기간을 단위로 데이빗 보위를 조명하려는 시도가 많긴 했습니다.

오늘 함께 자리해 주신 박지니씨는 보위에 관한 최초의 한국어 서적을 편집한 분입니다. 어떤 계기를 통해서 이 책을 내게 되셨는지 한 번 여쭤볼까요?

 

박지니: 저는 20089월쯤에 보위를 알게 되었어요. 오늘 오신 관객 분들보다 어쩌면 더 늦은 것도 같지만요, 그 때 덕후가 되었습니다. 출판사에 있으면서 우연히 책이라는 매체를 만들 기회가 자주 주어졌어요. 그런데 저는 덕후니까, 그런 욕심이 있잖아요? 내가 좋아하는 아티스트에 대한 책을 만들어보고 싶은 욕심이요. 그렇지만 덜컥 책을 내자는 제안을 하기는 어려웠고, 그가 죽고 나서 어느 정도 화제가 되고 나서야 이야기가 가능했죠. 특별히 이 책, <데이비드 보위와 그의 영향>은 데이빗 보위의 팬이었던 한 철학자가 쓴 책이라는 점이 특이하기도 했구요, 그런 사정들 덕분에 최종적으로 출판이 결정된 것 같습니다.



 

 

● 데이비드 보위를 좋아하게 된 이유

성문영: 저는 국내에도 데이빗 보위의 팬이 많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오직 보위만 좋아하는 팬이 어느 정도나 될까? 그런 생각도 하게 됩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한국에서 찬밥 취급을 당하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롤링스톤스 같은 그룹을 생각해보면요. 음악뿐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방면에서도 우리가 충분히 관심을 가질 만한 그룹이니깐요, 국내의 청중들도 그 점 때문에 더욱 애정을 가지고 있죠. 단지 음악만이 가치있는 것이 아닌 아티스트는 국내에서도 어떤 방식으로든 찔러보고, 건드려보고, 의미있게 다루어지게 마련입니다. 데이빗 보위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는데, 왜 지금껏 국내에서는 다루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드네요.

조금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저에게 데이빗 보위의 일생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것의 한 가지 모범처럼 느껴져요. 자신 안에서 꺼내보고 싶은 것을 모두 꺼내어보고 나서 죽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요. 특히 베를린 시기*는 데이빗 보위가 가진 카멜레온과 같은 다양한 이미지가 결정적으로 드러나는 조각이죠. 그 직전 시기는 코카인 중독 때문에 예술적인 면에서도, 생활면에서도 망가져있었고, 그 와중에도 계속 활동을 하다보니 실언을 하거나, 회수 불가능한 행동을 자꾸 하게 되었죠. 그래서 도피하듯이 떠난 곳이 베를린이고, 전과는 완전히 다른 어두운 음악들을 시도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서 데이빗 보위는 완전히 다시 태어나요. 사람들도 보위를 진지하게 평가하게 되구요.

한창 지기 스타더스트로 활동할 때 그런 말을 했다죠, 젊었을 때 죽고 싶다는 말이요. 사실 어릴 때 성공을 맛본 많은 아티스트들이 비슷한 말을 남겼지만, 데이빗 보위는 베를린 시기를 거치면서 그 유치한 낭만의 단계도 뛰어넘은 거죠.


*베를린 시기데이빗 보위의 활동 기간 중 1970년대 후반에 해당되는 시기보위는 1973년 <지기 스타더스트>라는 캐릭터를 버리고이후 코카인 중독에 빠져 갖은 스캔들과 실언을 일으키는 등 방황의 시기를 보냈다스스로에 대한 환멸감을 극복하기 위해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서베를린에서 3년여의 시간을 보낸 후독일 전자음악의 영향 하에 1977년부터 발표된 <Low>, <Heroes>, <Lodger>는 이전의 작곡 스타일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것으로보위의 음악 인생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박지니: 보통 대중적으로 입문하는 곡이 “Life on Mars?”이죠. 저도 이 곡을 제일 좋아했구요, 사실 다 좋아하죠, 무조건 다 좋아합니다. 그렇지만 처음 보위를 좋아할 때의 폭발적인 열광은 이미 다 소화가 된 느낌이구요, 지금은 조금 다른 의미에서 저에게 중요한 아티스트라고 느껴져요.

일단은 보위의 음악과 일생을 따라가다 보면, 영국을 비롯해서 전체 팝, 락 음악의 역사를 다시 읽어보게 된다는 점에서 제게 도움이 많이 돼요. 처음에도 말씀해주셨지만 보위는 활동 시기도 굉장히 길고, 자신이 음악으로 표현한 것의 종류도 너무나 다양해서 대중 문화 전반에 연결 고리가 지어져 있습니다. 덕분에 저는 20세기 후반의 영국 문학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건 저도 그렇지만, 자기 스스로가 사회와 잘 안 맞는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보위와 동질감을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보위가 스스로를 외계인으로 이미지화한 것도 그런 의미니까요. 비슷한 부류의 예술가를 만났을 때, 자신과 아티스트가 공명하면서 느껴지는 힘 같은 것, 그것이 좋았던 것 같아요. 특히 저로서는 베를린 시기의 음악이요.

베를린 시기에 데이빗 보위는 지기 스타더스트 때의 매니지먼트 인원을 다 해고시키고, 오직 지인들로만 구성해서 다녔다고 해요. 다큐에서도 나왔지만 베를린에서 생활할 때는, 터키 이민자들과 같은 곳에서, 하급 노동자들과 같은 생활 방식을 따랐다고 하구요. 창문으로 바라보면, 베를린 장벽 바깐으로 동독 경비병들이 바라보고 있는, 그런 긴장된 상태에서 작업을 했다고 합니다. 그 때 보위가 남긴 말이 인상적이에요. 전에는 모든 혼란이 내 내면에 있는 것 같았는데, 그 상황에서는 모든 위험과 혼란이 내 바깥에 있었다. 그 덕분에 내가 내면의 혼란을 바깥으로 끄집어낼 수 있었던 것 같다구요.

 

 

관객과의 문답

Q. 저는 학창 시절 영국에 있을 때, 팝 음악을 좋아하고 깊이 파는 과정에서 데이빗 보위를 알게 되었어요. 그런데 다른 뮤지션도 많이 좋아했기 때문에, 데이빗 보위가 특이하다는 생각은 많이 했지만 그 땐 그렇게까지 좋진 않았거든요. 나중에서야 좋아하게 되었고, 그가 죽었던 날에 속보를 듣고서, 너무 울었던 탓에 밥도 못 먹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런데 보위의 영향력이 한국에서는 왜 그렇게 축소되어 있었을까요? 중성적인 이미지를 수용하지 못해서일까요? 그 이유에 대해서 평론가님의 의견을 좀 더 들어보고 싶습니다.

 


 

성문영: 중성적인 이미지를 우리나라가 수용 못했던 건 아닐 거예요. 80년대 당시 우리나라에서 듀란듀란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걸 생각해보면 말이죠. 분장 때문이라기보다는 음악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일단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보위가 알려진 것은 팝 가수라는 타이틀이었는데, 데이빗 보위가 가진 엄청난 위상이 먼저 전달이 되었던 탓인지, 오히려 음악 그 자체는 우리나라 사람들 감성을 자극하기에는 조금 부족했던 것 같아요. 이른바 원 히트 원더로 남을 곡이 있었다면 우리나라에서도 보위라는 이름은 오래도록 남았겠지만, 그런 것도 없었으니까요. 저의 사적인 견해입니다.

 

박지니: 표지를 만들 때, 1975년쯤에 찍힌 사진인데요, 디자이너 분께 제가 요청드린 건 단 하나였어요. <지기 스타더스트> 시절의 이미지만 빼달라구요. 우리나라에선 뭔가 이런 괴기한 이미지만 너무 도드라지는 것 같아서 아쉬웠습니다. 사실 베를린 시기 이후부터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있는데, 그의 젊은 시절에 일순간 반짝했던 그 이미지만 주목되는 것은 안타깝죠. 그저 충격만 주고, 감동은 주지 못한 것 같습니다.

 

성문영: 그런데 데이비드 보위의 노래가 너무 이상하진 않거든요. 저는 “Space Oddity”를 제일 좋아했고, 음악적 감수성이 전혀 모자라지 않아요. 그리고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보위가 이룩한 여러 문화 전반에 대한 의미있는 성취들도 너무나 많은데, 이 부분에 대해서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애착을 가지고 접근하려는 시도를 거의 볼 수 없었던 것 같아요. 아마 오늘 이 다큐가 많은 사람들에게 일종의 계몽적인 효과를 가하지 않을까, 그런 기대도 해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다큐를 봤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다큐 콘서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데이빗 보위의 음악을 들었습니다. 다큐에서 소개된 “Rebel Rebel”이라는 곡, “All the Young Dudes”라는 곡을 부르는 장면은 특별히 관객과 데이빗 보위 사이의 교감이 뜨겁게 이루어지던 장면이었습니다. "Where are we now?"는 보위가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는 진지함과 쓸쓸함이 묻어나오는 곡이었구요. 언제나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아티스트들은 그 스스로가 일생을 바쳐서 이룩한 진지함에서 많은 감동을 주는 것 같습니다.

특히 데이빗 보위라면, 저도 그렇게 느끼지만, 자기 스스로를 이방인처럼 느끼는 많은 사람들과 공명할 수 있는 힘이 있는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EBS 스페이스 공감을 통해서 제 삶에 꽤 많은 영향을 끼친 음악가들을 많이 만났었는데요, 오늘처럼 다큐멘터리 필름을 통해서 새로운 예술가를 알게 되는 것도 멋진 경험인 것 같습니다.

 

/ 자원활동가 기록팀 김현대

사진/ 자원활동가 고은주